공존은 느리지만 사라지지 않는다

서평인 듯 아닌 듯 책과의 대화이자 최초로 써보는 내 식의 존재론적 철학

by 뚱냥이

잔 카제즈의 <동물에 대한 예의>를 읽다가 떠오르는 단상을 짤막한 에세이 형식으로 정리해봅니다.



공존은 느리지만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오래전부터 세계를 서열로 이해하는 방식에 불편함을 느껴왔다. 인간은 왜 고등과 하등을 나누는가. 왜 위계가 없으면 세상의 질서를 이해할 수 없다고 믿는 것일까. 그러나 질서란 반드시 위에서 아래로 정렬되어야만 성립하지 않는다. 일례로 숲은 서열로 유지되지 않는다. 서로 다른 높이의 나무, 빛을 덜 받는 풀, 이름 모를 균류가 얽혀 하나의 생태계를 이룬다. 차이는 존재하지만 그 안의 생명체들 사이에 지배 복종 관계는 없다.


나 역시 차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 차이가 생존의 존엄성과 개체의 자유를 침범하지 않는 선에서만 인정될 수 있다고 믿는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는 인간적 의미의, 의식적 선택만으로 한정되는 개념이 아니다. 꽃이 향기를 피우는 방식, 철새가 이동하는 경로, 갯벌이 밀물과 썰물에 몸을 맡기는 리듬까지 포함하는 생태적 선택이다. 존재는 각자의 방식으로 생존을 모색한다. 그것은 우주의 질서에 가깝다.


그래서 나는 생존의 경제성을 따질 때조차 미래 가치를 함께 계산한다. 갯벌을 매립해 아파트를 짓는 일은 단기적으로는 이익일 수 있다. 그러나 장기적 생태 비용, 기후의 붕괴, 해양 생태계의 파괴까지 포함하면 그것은 결코 값싼 선택이 아니다. 그러하기에 느리고 단기적으로 비효율적으로 보이더라도 나는 갯벌을 지키는 편에 기꺼이 서겠다. 느린 선택이 반드시 틀린 선택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수많은 기후 위기와 생태 담론을 통해서 인류의 지성은 이제 그 정도는 이해할 만큼 성숙했다고 믿는다.


문화적 번영 역시 특정한 형태로만 번역될 이유는 없다. 초고층 건물과 GDP 수치만이 번영의 증거일까. 아이가 동물과 함께 자라며 생명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일, 자연과 숨 쉬는 체험을 통해 윤리적 감각을 확장하는 일 또한 문화다. 공존은 낙후가 아니라 또 다른 형태의 발전 모델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지구 상에 존재하는 여타의 존재들이 각자의 생명답게 사는 방식이 왜 번영의 범주에 포함되지 못해야 하는가. 이 점을 고려해 본다면 우리가 얼마나 번영의 개념을 협소하게 규정해왔는지 알 수 있다.


나는 관계를 의식의 조건으로 이해한다. 의식은 선재하나 관심이 있을 때에 비로소 그 존재는 가시화된다. 그러하기에 내게 있어 무관심은 즉 존재의 소멸이다. 그래서 관계 맺기를 주체적으로 거부하는 일은 어떤 의미에서 타자를 내 의식에서 지워버리는 행위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의식과 주의는 한정적인 자원이기에, 우리는 모든 관계를 끝까지 붙들 수는 없다. 여러 번 기회를 주되, 내 세계를 파괴하는 선택을 반복하는 이들에게는 고통 없이 작별을 택한다. 그것은 잔혹함이 아니라 보존이다. 나와 내 사유의 미래를 지키기 위한 선택이기 때문이다.


나는 빠른 사람이 아니다. 열네 살에 구상한 세계를 마흔이 넘은 지금까지 붙들고 있다. 무반응 속에서도 사유를 멈추지 않았다. 시간은 나를 소모시키는 적이 아니라 나를 구성하는 재료다. 속도가 아니라 지속이 나를 만든다. 그래서 10년의 비웃음은 나를 흔들지 못한다. 나는 원래 느리다. 그리고 느림 속에서 사유와 경험을 축적한다.


고통에 대해서도 나는 쉽게 합의하고 싶지 않다. 신경학적 구조만으로 고통을 설명하는 접근은 사회문화적 맥락을 제거한다. 인간의 뇌는 성별이나 인종에 가중치를 두지 않지만, 사회는 특정 집단에게 더 많은 고통을 요구해왔다. 고통은 생물학적 신호이면서 동시에 정치적 배치다. 누가 더 참아야 하는가, 누가 더 감수해야 하는가는 합의라는 이름 아래 재배치되어 왔다. 그렇다면 동물에게 부여되는 고통 역시 뇌의 구조만으로 환원될 수 없다. 고통은 언제나 관계 속에서 증폭되거나 은폐되기 때문이다.


나는 사회가 고통을 어떻게 재배치하는지 질문한다. 그리고 그 합의를 조금이라도 이동시키고 싶다. 거대한 구조는 한 번에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한 개의 문장이 누군가의 생각을 건드리고, 그 생각이 또 다른 선택을 만들면, 합의는 아주 미세하게 이동한다. 나는 혁명을 꿈꾸지 않는다. 오랜 시간에 걸쳐 의식의 밀도를 높이고 싶을 뿐이다.


설령 내가 끝내 사회를 바꾸지 못하더라도, 내 사유를 남겨두고 싶다. 글과 말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누군가의 내면에 잠복해 있다가 어떤 결정의 순간에 떠오를지도 모른다. 씨앗은 심는 사람이 열매를 보지 못해도 자란다. 나는 시간의 힘을 믿는다.


나는 오랫동안 고독 속에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평안하다. 평안은 확신에서 오지 않는다. 지속에서 온다. 나는 내 속도로 생각하고, 내 방식으로 관계 맺고, 내 철학을 삶으로 번역한다. 공존은 이상이 아니라 실천이다. 느리지만 사라지지 않는 선택.


세계는 위계로만 유지되지 않는다.

세계는 연결로 유지된다.


그리고 나는 언제나

그 연결을 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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