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빽있는 상대방을 대하는 일반인의 자세

될놈은 된다

by 고니파더

얼마 전 낙하산 인사에 대한 글을 썼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공감을 해주신 것 같아 조금 놀라기도 했는데, 그만큼 같은 고민, 피해 경험, 억울한 일들이 많다는 이야기겠죠.


그나마 이렇게 어려움을 서로 공유하면서 이겨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빽과 능력에 관련된 글 2탄입니다.


짐짓 빽 없는 분들이 당하기만 하는 것 같은 억울한 부분만 있는 것 같은데,


'나는 능력으로 빽을 제압한 경험이 없었나?'라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오늘은 제가 직접 경험한 사례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에 앞서 사실 빽 믿고 까부는 사람들을 실력만으로 이기다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는 않습니다.


왜냐면 첫 시작부터 정당한 경쟁이 안 되는 환경에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기울어진 경기장 혹은 운동장이라고 보통 표현을 하죠.


이런 현실에 대해서 '어차피 안된다'라고 포기하고 좌절하기보다는,


가지고 있는 능력을 갈고닦아 준비하다 보면 언젠가는 기회가 주어진다고 봅니다.


이건 그냥 하는 말이라 제가 직접 경험한 것이니 믿어도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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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사례를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바야흐로 2016년.


당시 저는 은행에서 근무하며 심사역 업무를 맡기 시작했었죠.


무탈하게 별거 없는 날들이 지나가고 있던 어느 날,


사내에서 '해외 MBA 지원자를 모집한다'는 공문을 접하게 됩니다.


지원 대상은 1~2명.


복리후생이라고는 도무지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곳에서 1년 넘는 기간 동안 학비도 지원해 주고 급여도 정상적으로 지급해 주는, 그야말로 파라다이스급 파격적인 교육 지원 정책이었죠.


'나도 해볼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그렇게 마음이 흔들리던 찰나, 이상한 소문을 하나 듣게 됩니다.


어차피 내정자가 정해져 있어 그거 모르고 지원하는 사람들은 그냥 들러리를 서는 것일 뿐이라는 이야기.


'그래. 저런 혜택은 나에게까지 오지 않지. 선택받은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거지. '


소문을 듣고 그렇게 마음을 접고 있던 어느 날.


기운 빠져 있던 제 모습이 신경 쓰였는지 와이프가 회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더군요.


그래서 '좋은 기회가 있긴 한데, 어차피 내정자가 정해져 있다고 한다. 객관적으로 내가 Fit 이 맞아 보이는데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냐. 아쉽지만.'


이렇게 대답했더니 와이프 왈.


'참 이상한 조직이네. 하지만 어차피 밑져야 본전인데 한번 해보는 것도 좋지 않아? 떨어지면 넌 실력이 없어서 떨어지는 게 아니라 빽이 없어서 떨어지는 거고, 니 말대로 실력이 된다면, 그리고 실력만 본다면 합격할 테니 너와 우리 가족한테 좋을 테고'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생각해 보니 제가 잃을 건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와이프의 지적에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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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실패할 거라고 하더라도 최선의 노력을 다하자. 그래서 떨어져도 후회가 없다.'라는 생각으로, 그때부터 약 2주간 미친 듯이 면접 준비를 했습니다.


'왜 여기에 지원하게 되었는지'부터, '갔다 와서 어떻게 조직에 기여할 수 있는지'까지,


혹시 몰라 시키지도 않았는데 영어로 자기소개서도 준비하고, 대입 면접처럼 예상 질문도 30개 정도 미리 정해서 연습하는 등 정말 무슨 입시생처럼 준비했습니다.


진짜 재미난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되는데요.


면접을 하루 앞둔 목요일 오전, 갑자기 최종 면접관으로 지정된 K 임원의 부친상 부고가 게시판에 올라오게 됩니다.


해당 임원은 이번 공모절차에 있어서 유일한 최종 면접관이었는데, 들리는 소문으로는 그가 XX 부서의 OO 차장을 밀고 있다고 했습니다.


사유는 과거 OO 차장이 임원 비서를 하면서 여러 가지 도움을 주었다는 것.


또 그 차장의 아버지가 타 은행의 CEO 출신으로 Backgroun 힘이 상당하다는 것.


'뭐 그럴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결국 자연스레 '면접 날짜가 뒤로 밀리겠구나' 예상하고 있던 찰나, 인사팀 담당자로부터 전화 한 통이 오더군요.


"심사역님. 이번 해외 학술연수에 지원해 주셨는데요. 내일 면접 시간이 한 시간 뒤로 밀릴 것 같습니다."


"아예 일정이 바뀌는 건 아니고요?"


"들어서 아시겠지만 K 부행장님이 지금 상중이라서요. 어쩔 수 없이 면접위원을 바꿔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섭외 중입니다.


또 면접자 중에서 지방에서 올라오시는 분들도 몇 분 있고 이미 표를 다 예매한 상태로 일정은 그대로 갑니다."


그야말로 하늘이 내려준 기회가 저에게 생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후 면접관들은 5명의 본부장급 인물들이 대체되었습니다.


이분들의 면접이 지금도 굉장히 신기하고 재미있는 기억으로 남아 있는데요.


1명의 면접자를 대상으로 거의 50분에서 1시간 이상의 면접을 진행했습니다.


제 순서를 기다리며 '아니. 왜 이렇게 오래 붙잡고 있지?'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마지막 면접자였던 저의 면접시간은 1시간 30분이 넘어간 걸로 들었습니다.


그야말로 엄청난 압박, 다양한 질문들이 쏟아졌고 저 역시 그동안 준비했던 모든 것을 쏟아부었던, 정말 기억에 남는 면접이었는데요. 끝나고 나니 허기가 질 정도였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대타로 참석한 면접관들도 엄청 긴장하고 있었고, 특혜 시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했다고 합니다.


결국 "공정성" 하나에 포커스를 두고 "능력 있고 준비되어 있는 친구, 조직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을 뽑자고 의견이 모아졌다고 합니다.


참고로 그 당시 OO 차장은 면접을 보고 나서 곧바로 K 임원의 상갓집으로 향했다고 합니다. 그 상갓집에서 무슨 말이 오고 갔는지 저는 잘 모르겠지만...


그렇게 시간이 흘렀습니다.


1주일 뒤 나온다는 결과는 K 임원이 업무에 복귀하고 나서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유를 들어보니 최종 합격자 명단에 본인이 지정했던 OO 차장의 이름이 보이지 않았던 것. 그래서 계속 결제를 반려하고 있다는 것이었죠.


"왜 이런 결과가 나왔고 면접 과정에서 특별한 문제는 없었는지, 제대로 이루어졌는지, 채점표까지 가져오라" 하면서 엄청 딴지를 걸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공정성에 포커스를 두고 제대로 심사한 면접관들의 채점표가 엄청 상세하고 방대한 자료였고, 이걸 본 K 임원도 결국은 합죽이가 되었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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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말 없이 '어쩔 수 없네'라고 하면서 그대로 합격자를 발표하라고 했다고 합니다.


3주 뒤, 합격자 발표가 나왔고 저는 1등으로 지원 대상자가 되었습니다.


점수는 비공개가 원칙이었으나 인사팀에 있던 동기를 통해 전해 들었습니다.


그 동기조차도 '어떻게 네가?'라는 식의 반응을 보여주더군요.


재밌는 것은 원래 합격자가 1~2명이었는데, 최종 발표에서는 3명으로 늘어나 있었다는 것.


추측하셨겠지만 3등이 OO 차장이었음.


이후 이야기는 제 블로그 내 영국 유학 챕터에 있는 것들과 연결됩니다.


저와 제 가족에게 너무 즐겁고 소중한 시간을 영국에서 보내고 왔죠.


당시 합격 발표가 나고 면접관 중 안면이 있던 부장님께 전화를 드려 고맙다고 했습니다. (정말 존경하는 분이었는데, 얼마 전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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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이 제게 해주셨던 말이 아직도 잊히지가 않네요.


"내가 널 합격시켜 준 게 아냐. 그러니 나한테 고맙다고 하지 말고 준비 잘한 본인 자신한테 고마워해. 정말 준비 잘했어. 면접관들 모두 이 사람 안 뽑고 누굴 뽑아?라는 말을 많이 했었어. 어차피 될 놈은 되는 거야."


오늘은 능력으로 빽을 물리친 (?) 저의 과거 이야기를 해봤습니다.


솔직히 능력 있고 아무리 많은 준비를 해도 학연, 지연, 혈연이 없으면 기회조차 붙잡기 힘든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주저앉아 있기에는 지나가는 시간이 너무 아깝다고 생각해요.


기회는 옵니다.


그리고 될 놈은 언젠간 되고, 떨어질 놈은 언젠가는 떨어집니다.


그 언젠가를 위해 오늘도 끊임없이 엔진을 켜둬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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