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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와 3만 원

복학생의 허영

by 노멀휴먼

어렸을 적에 어른이 되어서 꼭 가지고 싶은 것 중에서 하나가 자동차였다.

주말만 되면 아버지는 우리를 차에 태우고서는 바닷가든 산이든 달려가셨다.

그래서 내 어린 시절, 여행이라는 단어와 자동차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그래서 나도 어른이 되면 꼭 자동차를 가지고 말 것이라,

자동차로 여기저기를 누비고 다니리라 다짐했다.


그 소원은 내가 어른이라고 생각하기 전에, 생각보다는 조금 시시하게 이루어졌다.

군대를 제대하고 나서 대학에 복학했던 시절,

동아리나 모임 등 여기저기 나를 받아줄 곳이 있는지 기웃거렸으나,

모두 실패로 점칠 되다 보니 할 일이 워낙 없었다.


그러다 보니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공부밖에 없었고,

굉장히 서글픈 이유로 장학금을 조금 받았다. 마치 아픈 만큼 성숙해지듯이 말이다.


내가 학교에서 받은 장학금을 어디다 써야 할지 고민하던 차에,

아버지께서 차를 하나 바꾸시면서 기존에 가지고 계시던 차를 처분하려 하셨는데,

생각보다 잘 팔리지 않으셨나 보다.


그래서 아버지는 특단의 조치로 부자간 금전거래를 제안하셨는데,

우리 아버지 기준으로 헐값에 내 기준으로는 합리적인 가격으로 거래가 성사되었다.

다만, 금전이 거래되던 순간 아버지가 짓던 회심의 미소를 보며,

내가 과연 성공적인 거래를 하고 있는 것이 맞는지 조금 의심이 들기도 했다.


차 거래가 완료되고 난 뒤,

아버지께서는 내가 자동차 보험을 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씀하시며,

일 년 동안은 본인의 특약을 통해서 보험료를 내지 않아도 되지만,

그다음 해에는 내가 직접 내야 한다는 사실과 또한 자동차 세라는 것이 생긴다는 것을 언급하셨다.


그런데 대학교 3학년 때 갑작스럽게 차가 생겼는데 누가 그런 것에 신경을 쓰겠는가.

지금 당장 내가 내야 할 돈은 없는 것이고,

일단 친구들과 후배들을 불러서 여기저기 쏘다니는 것이 중요한 나이인데 말이다.


그렇게 2주가 지났다.

걸어 다녀도 되는 거리를 차로 가는 것이 익숙해지고,

주말에 공부를 하기보다 교외로 드라이브 가는 것이 자연스러워질 때쯤,

내 생활에 브레이크를 걸어준 것은 비어있는 내 통장이었다.


연료가 부족해서 들렀던 주유소에서 3만 원어치의 기름을 넣지 못하자,

나는 차 핸들을 잡으며 굉장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차 안에는 내가 잘 보이고 싶은 여자 후배들이 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내가 가지고 있는 카드라고는 체크카드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나는 잠시 차 밖으로 나가서 SOS를 요청하기 위해 부모님께 전화했다.


“아빠, 저 지금 차 가지고 주유소 왔는데요.

기름을 넣긴 했는데, 돈이 없어서 못 나가고 있어요.

저 아르바이트 비용 들어올 때까지만 조금 빌려주시면 안돼요?”


아버지께서는 굉장히 다정하신 목소리로,

그런 상황이 되어서 매우 안타깝게 느끼신다며,

이번 일을 계기로 계획적으로 돈을 사용하게 되기를 바라신다고 하셨다.


그리고 계획적인 금전 소비를 위해서는 가끔 시련이 필요할 때도 있으며,

아마도 본인의 생각으로는 그때가 지금인 것 같다고,

아들의 인생을 위해 파이팅을 외치며 전화를 끊으셨다.


나는 아버지가 장난을 치신다고 생각하여 다시 전화를 드렸다.


“아빠 저 지금 좀 심각한 게,

여자 후배들이 차에 타 있는 상황이라 잠시만 돈 빌려주시면 이번 달 중으로 다시 갚아 드릴게요.”


아버지께서는 굉장히 자애로운 목소리로,

가족 간 금전거래는 장기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이 많으니,

나의 밝고 희망찬 미래를 위해서는 단순한 시련을 몇 번 겪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하셨다.


또한 자동차의 엔진보다는 두 다리의 엔진이 건강에 좋다고도 알려주셨다.

그리고 마지막 맺음말로 부모님 자신들은 나를 매우 사랑하시며,

나의 미래를 위해 항상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전하며 다시 전화를 끊으셨다.


전화를 끊고 나니 눈앞이 캄캄했다.

다시 전화해서 억지라도 부려볼까 했지만,

부모님의 성향상 전화를 차단하면 차단했지 돈을 보내주실 분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친구에게 전화를 해 보았지만, 수업 중에 졸고 있는지 통화가 되지 않았다.

나는 체념하고 다시 차로 돌아와서 여자 후배들에게 이야기했다.

지금 급한 일로 카드에 돈이 빠져나가서, 3만 원만 빌려줄 수 있냐고 말이다.

아, 그 말을 듣고 있던 후배들의 표정이란.


어쨌든 그 후 돈도 없는데 차를 타고 다니는 복학생으로 소문이 나버린 나는,

부모님의 표현대로 계획적인 금전소비를 위해 자동차보다는 두 다리의 엔진을 자주 가동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지 차를 거래하던 때, 아버지는 이미 나의 미래를 아셨던 것 같기도 하다.


그 후로 지금까지 자동차가 있어도 잘 타고 다니지 않는 편이다.

사실 서울은 너무 대중교통이 잘 되어 있어서,

굳이 도로 정체를 감수하면서 차를 타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한 달에 1~2번 타는 자동차를 위해 매년 작지 않은 금액의 보험료가 나가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아버지가 계획했던 회심의 전략 덕분에, 나는 꼭 필요할 때가 아니면 운전을 잘하지 않게 되었다.

그 당시 아버지의 판단이 전적으로 옳았음에 동의한다.


다만, 대학교 졸업 이후에 한참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 당시 후배들이 나를 바라보던 눈빛은 잊히지 않는지,

이번 고향에 내려가면 부모님께 한번 여쭈어 보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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