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할 가치가 있는 이야기
나는 어릴 적 방학 숙제로 일기를 써 오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늘 개학 직전에 한 달 치를 벼락치기로 몰아치곤 했다.
그래서 그 한 달 동안 날씨를 죄다 '맑음'으로 도배했는데,
그게 하필이면 긴 장마로 비가 퍼붓던 시기였다.
결국 방학 후에 선생님께서 나를 보고,
“혹시 해외여행으로 날씨 좋은 데 갔다 왔냐?”라고 핀잔을 주던 일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시절의 일기란 나에게,
단지 얼렁뚱땅 대충 끝내야 하는 숙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군대시절 이후에,
선임들의 끝없는 잔소리와 군대 문화에 대한 소심한 반항으로
어쩌다 보니 독서에 빠져들게 되었고
어른이 되어 또 어쩌다 우연히 읽게 된,
지금은 제목조차 기억나지 않는 책에서
"인생을 긍정하는 방법은,
자신의 인생이 기록될 만큼 가치가 있다고 믿는 것이다."
라는 문구를 본 이후로 거의 10년째 일기 쓰기를 하고 있다.
처음에는 정말 막막했다.
일기를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
어린 시절처럼 '오늘 날씨는 맑음.' 이렇게 시작하기도 했고,
쓰다 보니 채울 말이 없어져서
'어제저녁은 계란밥을 먹었고, 점심은 회사에서 된장찌개를 먹었고, 아침은.. 뭐지, 기억이 안 나네?'
같은 메뉴 나열로 끼적이기도 했다.
아무튼 지금은 어느 정도 일기 쓰기라는 것이 습관이 될 만큼
본격적으로 내 인생에 자리 잡았고,
아침마다 A4 한 장 분량으로 일기를 쓰는 게 일상이자 습관이 되었다.
가끔 초년생 시절의 내가 그리워 과거 일기를 펼치면,
부끄러움이 몰려와 바로 덮어버리는 일이 다반사다.
그 시절의 나는 너무도 순진하고 어설프며, 허당끼가 넘치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돌이켜보면 그 시절에도 나름대로의 진지함이 있었다.
미래에 대한 고민, 우정과 사랑의 기쁨과 슬픔,
그리고 무수히 많은 바보 같은 실수들…
“다신 이러지 말아야지!” 다짐했지만, 한 달 뒤엔 또 똑같이 실수하는 나.
그런 내 모습이 일기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모든 게 흑역사로 보이기도 하지만,
그 흑역사가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그 시절의 나와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다.
그리고 깨닫는다.
과거에는 도저히 긍정적으로 보이지 않던 사건들도,
일기라는 기록 덕분에 소중한 추억으로 변한다는 것을.
처음엔, 단순히 있어 보이는 문장에 끌려 시작했던 일기 쓰기.
하지만 10년이 지나고서야 이 문장이 말하는 바를 어설프게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반대로, 10년이나 걸려 이해한 나 자신이 좀 우습기도 하다.
아무튼,
결국 인생을 긍정하는 방법이란
“내 삶이 기록할 가치가 있는 이야기”라고 믿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