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인데 보일러 고장 났어요.
어릴 때는 물이 귀했다. 수돗물이 나오지 않을 때는 양동이를 이고 물 길러 가는 언니를 따라다녔다.
언니는 나랑 고작 두 살 차이다. 머리에 무거운 물동이를 이고 가는 언니는 나의 워너비였다. 언니는 철봉도 잘했고 달리기도 잘했다. 초등학교 4학년 나이인 11살쯤부터 물동이를 이고 다녔다.
내가 동경의 눈빛으로 쳐다보면 언니는 한 번 해 보라고 내게 물동이를 이어줬다. 나는 일어나지도 못해 포기하기 일쑤였다. 조금 힘들면 짐을 언니에게 넘겨버렸다. 내게는 믿을 구석이자 개길 곳이 있었다.
명절이라 홀로 계신 엄마에게 내려왔다. 다들 생업에 바빠 혼자 내려온 지 몇 년이다.
추우니 보일러를 틀고 지내시라 해도, 하나도 안 춥다, 여긴 남쪽이라 따뜻하다, 매일 노치원 가서 있는데 뭐 하러 트냐, 전기장판이 있어 괜찮다며 틀지 않으셨다.
막히는 걸 피해 서울에서 늦게 출발하니 한밤중에 도착했다. 연휴는 이미 시작되었다. 주무시고 계신 엄마를 살피고 나도 잘 준비를 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보일러를 틀었다.
어라! 보일러에서 44라는 숫자가 깜빡이고 있다. 뭐지? 온돌 온도인가? 다시 스위치를 켜봤다. 연소에 빨간불이 들어오다가 이내 꺼져버린다.
불길하다. 제발 이러지 말자. 챗지피티, 네이버 등을 검색해 할 수 있는 방법을 해보았지만 여전히 작동이 안 된다.
연휴이긴 하지만 보일러 고장 접수가 되어 입력해 놓았다.
방마다 전기장판이 있어 다행이었다. 날씨가 춥지 않아 다행이었다. 문제는 온수! 당장 씻는 것부터 불편하다. 오자마자 다시 내 집으로 가고 싶다. 엄마 모시고 올라가 버릴까? 5시간 동안 운전해서 내려왔는데, 보일러 때문에 올라가려니 눈앞이 아득하다.
편리함에 중독되었나? 예전엔 물도 없을 때가 있었는데. 물동이를 이는 언니가 멋져 보였는데. 잠시 불편하다고 생각이 서울까지 뻗어버리다니. 잠시 눈을 감고 기도했다. 이 상황을 어찌할까?
짜증이 났지만, 상황은 이미 벌어졌다. 엄마처럼 살기로 했다. 가스레인지는 작동되니 얼마나 감사한가. 물을 데워 세수했다.
다음날엔 머리 감기 힘드니 대중목욕탕에 갔다. 웬만해선 목욕탕에 가지 않는다. 몇 년 만에 간 거 같다. 씻고 나오니 개운하긴 하다.
그나저나 언제 보일러를 고칠 수 있을까.
연휴 내내 씻기 위해 목욕탕을 와야 하나 고민이다.
보일러기사가 전화했다. 에러코드를 듣더니 물이 새는 거라고. 일단 가봐야 알 것 같단다. 예전모델이라 부품도 없단다. 골치 아프다.
물이 안 나와 양동이를 이고 다니던 시절에도 골치 아픈 적은 없었다. 개길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보호자가 되고 보니 돌발이 생길 때 부모의 마음은 어땠을까 돌아보게 된다. 나이가 많아도 돌발에 유연하게 대처하려면 경험이 쌓여야 한다. 짜증과 골치대신 유연하게 대처하는 법은 모진 세월이 훈련시켜 준다.
‘날씨야 아무리 추워봐라. 내가 옷 사 입나.’라고 했던 광고구절이 떠오른다. ‘돌발아 아무리 일어나 봐라. 내가 흔들리나.’
엄마가 추운 시절을 어떻게 지냈는지 경험하고 있다. 기사가 와서 싹 고쳐주면 좋겠다.
찬물로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음식 하며 지낸 엄마의 악착같은 세월이 떠오른다. 그 덕에 자식들이 보호받으며 잘 자랐다. 없는 형편에 아끼고 살았던 어머니.
이제 우리 좀만 편하게 살아요.
연휴가 끝나고 보일러 기사가 왔다. 센서노후로 3만 4천 원 주고 교체했다. 연소에 빨간 불이 들어오니 마음이 놓인다. 엄마는 또 보일러를 꺼 버리겠지만, 아무 말도 안 했다. 실내온도 설정해 놓고 서울로 왔다.
어린 나이에 물동이를 이고 다닌 언니의 마음이 어땠을까 생각해 본다. 개길 구석도 없었던 맏이는 몸으로 때웠던 거 같다. 모질고 힘들어도 살아낸 엄마, 엄마의 말에 복종했던 언니. 놀라운 여인들은 자기도 모르게 사람을 살리며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