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진짜 짜증 난다!
작년 6월 초 새벽에 언니에게 전화가 왔다.
아침에 오는 전화는 항상 불안하다.
10여 년 전, 새벽에 전화벨이 울렸었다.
24살이었던 앞날 창창한 사촌동생이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이었다. 그날의 공기, 기분, 울부짖는 숙모의 목소리, 정확히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분명히 죽었다는 그 내용의 전화는 부정하기에 딱 좋은 내용이었다. 장례식장은 그야말로 울음바다, 슬픔의 바다였다. 내 사촌동생은 그렇게 포항의 어느 바다에 한 줌의 재로 뿌려졌다.
이런 연유로 아침에 오는 전화는 더욱 싫다.
부모님은 시골에서 두 분만 살고 계셨다. 부모님은 80이 되어가시면서 가끔씩 아침에 '세탁기 문이 안 열린다.' '컴퓨터가 안된다.' '핸드폰이 이상하다' 등등의 내용으로 전화를 하신다. 꼭 출근 시간에 그런 전화를 하신다. 나이가 들면 출근시간이 당신들의 활동시간이다. 그리고는 오전 10시쯤 되면 지쳐서 주무신다.
이런 전화를 받을 때면 짜증이 난다. 서울에 사는 내가, 세탁기 문이 안 열리는 상황을 직접 도와줄 수 없기에 더 그런 것 같다. 퉁명스럽게 나오는 첫마디는 ‘나보고 어쩌라고?’, 다시 숨을 돌리고 차분히 조금만 기다리면 열릴 거라고 말해주고는 전화를 끊고 고개를 흔들곤 했었다. 아버지는 성미가 어찌나 급한지 잠시 1,2분을 못 기다리신다. 세탁기 문은 2분 후에 열렸다고 한다.
2022년 6월 초 새벽에 아버지가 쓰러지셨다. 어제까지 건강하셨는데? 매일 병원에 출근해서 온갖 물리치료를 다 받고 다니시는데 무엇 때문에 쓰러지셨지? 119가 와서 진주에 있는 대학병원으로 간다는데? 왜? 갑자기?
평소에 아버지는 지극히 이기적이신 분이시다. 오직 당신의 안위만을 위해서 각종 검색을 하신다. 나라에서 주는 온갖 복지혜택을 다 받고 싶어 꼭 출근길에 해결해 달라고 전화가 오곤 하셨었다. 건강에 좋다는 '카더라'식품, 어르신들 카톡에서 돌고 있는 각종 건강식품과 습관들을 굳이 종이에 기록하시고 프린트까지 해서 모아 놓으시고 이것저것 취미 삼아 시도해 보신 분이시다. 정작 다리가 아파 끙끙 앓고 있으면서도 괜찮다고만 하시는 엄마에게는 한 푼도 쓰기 아까워하시는 것 같아 보이는 아버지였다.
딱히 존경할 것도 없는, 폭력과 무능력의 아이콘인 아버지가 쓰러지셨다고 하는데 눈물이 나왔다. 사실 이게 더 짜증이 나는 대목이다. 그냥 아버지가 집에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가 더 많았었다. 엄마를 때리고 욕하고 밥상을 뒤엎고 소리를 지르는 그 모든 것들이 떠오르면 진절머리가 나는데, 왜 지금 이 상황에서 눈물이 나고 불쌍한지 나 스스로가 기가 찼다. '이렇게 가시면 진짜 좀 불쌍한데'라는 마음과 함께 울면서 서울에서 내려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 시간쯤 후에 다시 전화가 왔다. 의식도 있고 말도 하시니 조심히 내려오라는 119 대원의 전화였다.
아무튼 진주까지 열심히 달려서 내려갔다. 엄마는 놀라서 온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우리 삼 남매는 급히 의논하고 뇌졸중이 온 아버지를 모시고 서울로 올라왔다.
이제부터 시작인 것이다. 일단은 병원에서 온갖 검사를 다했다. 급히 간병인도 구했다.
비용은 정말 만만치 않았다.
나는 어릴 때부터 신장이 좋지 않았었다. 결국은 이식수술을 할 수밖에 없었다. 수술을 하게 되었다고 언니가 부모님께 이야기했다. 신장은 언니가 기증해 줄 거라고 말했다. 그때도 아버지는 언니에게 '고맙다 네가 큰 일을 하는구나'라는 말대신에 '간도 크다. 돈은 어디 있어서 그런 수술을 하려느냐'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아버지가 편찮으시기 시작하고 앞으로 지출하게 될 예상비용을 생각하니 이 말이 내 안에서 허리케인급으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아버지로부터 수십 년간 들어왔던 온갖 험하고 모진 말들이 반신마비가 되고 목소리도 잘 나오지 않는 아버지를 대하면서 고스란히 떠오르고 있었다.
모진 말들은 없어지지 않았었다.
내 마음 아주 깊숙한 곳에 가라앉아 있었는데, 폭풍이 휘몰아치니 이것들이 수면으로 다 떠오르고 있었다.
아버지는 새벽에 화장실을 가다가 갑자기 왼쪽 팔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고, 그 길로 쓰러지셔서 겨우겨우 침실로 기어가셨다고 한다. 엄마는 나이가 드시면서 청각장애인 수준으로 청력이 떨어지셨고, 두 분은 이미 오래전부터 각방을 쓰고 계셨던 터라 아버지가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듣지 못하셨을 것이다.
쓰러진 시간이 새벽 4시쯤이었고, 엄마는 수면제를 드시고 잠을 청하시기에 늦게 일어나시는 편이시다.
그런데, 그날은 평소 답지 않은 이른 시간인 7시에 잠이 깨어 화장실에 가셨다고 한다.
무심하게 아버지 방 쪽을 쳐다보고 이상한 느낌에 거실까지 둘러보았다고 하셨다.
아버지가 안 계시니 오늘따라 일찍 어디를 나갔다보다 하고 생각하고 다시 안방으로 들어가려는데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고 하셨다.
그래서 다시 아버지 방으로 가 보니 아버지가 침실 한쪽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고 하셨다.
이미 3시간이 지난 이후에, 부랴부랴 도움을 청했고, 119 구급대원이 엘베도 없는 오래된 아파트 3층을 올라왔지만, 들것은 소용이 없었고, 아버지를 업고 병원으로 향했다고 하셨다.
골든 타임은 이미 지나버렸다. 뇌 사진상으로 수술도 할 수 없는 부분이 막혀버렸다. 재활 말고는 답이 없다고 한다. 급하게 남자 간병인을 구했다. 식비까지 합하여 하루에 14만 원의 일당을 드려야 했다. 한 달에 간병비만 400만 원이 들었다.
대학병원에 오래 있어봐야 비용만 늘어나는 꼴이라 요양병원으로 옮기게 되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돈이 많이 들어서 미안하구나'라는 말은 한마디도 안 하셨다.
설상가상으로 병원에 누워계시면서도 돈이 필요하다고 자꾸 말씀하신다.
이럴 때마다 짜증이 난다. 짜증을 내고 나면 나는 마음이 괴로워진다. 이런 마음속 쳇바퀴를 수십 번씩 한 것 같다.
아버지는 벌써 10개월째 전혀 호전되지 않은 상태로 요양병원에 계신다.
이제는 금요일이 되면 내가 당연히 토요일에 면회를 오는 줄 알고 전화 또는 카톡으로 필요한 것들을 사서 오라고 하신다.
병원에 누워계신데 양말이 몇 켤레나 필요하고, 겨울이 시작될 즈음 내복을 3벌이나 사다 드렸었다.
성미가 무척이나 급한 아버지는 전화를 하고 나면 다음날 바로 실행에 옮겨야 한다.
사다 드린 내복은 마음에 안 드신다고 한다. 이럴 때마다 지금 돈이 얼마나 들어가고 있는 줄 아냐고 말하고 싶다. 자꾸 돈이 필요하다고 하셔서 10만 원을 쥐어주고 온 날이 있었다. 그 주에 전화가 3번이나 왔었다.
'간호사가 돈을 가져갔으니 반드시 원무과에 가서 그 돈을 받아가라'. 그다음 날 또 전화가 온다. '돈을 받으러 와야 하는데 왜 아직 오지 않느냐'.
돈을 드린 내가 잘못이지 누굴 탓할까?
아버지는 여전히 1년 4개월째 병원에 계신다. 그리고, 콧줄도 1년 4개월째 하고 계신다.
폐렴에 걸리시고 한참 고생을 하셨었다. 그러다가, 언젠가는 엄마가 돌아가셨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폐렴에 너무 센 약을 쓰니 섬망이 왔었던 것 같았다.
엄마를 모시고 병문안 간 어느 날, 아버지는 펑펑 우셨다. “마누라, 당신이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있었구나” 우리는 다 같이 눈물을 훔쳤다.
일 때문에 바빠 잘 들여다보지 못한 내 형제들도 내가 겪었던 모든 과정을 그대로 겪고 있다. 다만 시기가 다를 뿐이다.
이런 아버지를 통해서도 살아 있는 존재만으로도 가족에게는 어떤 것들이 있음을 배우게 된다.
글로 쏟아내었던 나의 분노도 이제 조금씩 적응이 되어가는 것 같다.
그런데, 나의 기억력과 건망증이 무척이나 증가했다.
애증의 관계인 아버지의 쓰러짐이 내게도 큰 충격이었나 보다.
결혼하지 않은 싱글인 나는 부모님의 역사를 알고 지금의 상황을 보면서 참 이해할 수도 없는 부부관계의 신비를 보는 것 같다.
그렇다. 가족은 그냥 설명할 수 없는, 끈끈한 그런 관계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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