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동안 감사했습니다.
1971년 생, 베이비 붐 세대, x세대, 오렌지 족. 이런 용어가 나의 한창때 유행하던 말이었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대기업에 취직했다. 페인트 회사에 입사한 첫날, 신입사원들은 회사 임원진과 회식했다. 대졸 여자 신입 사원은 딱 2명이었다. 갈빗집에서 맛있게 고기를 먹고는 2차로 통째로 빌린 나이트에 갔다. 생전 처음 그런 곳에 가봤다. 그 첫날 나는 아버지 뻘 되는 상무와 부르스를 춰야 했다. 사회의 참 맛을 찐하게 느꼈다. 맛은 더럽게 없었고 역겹기까지 했다. 그때 이후로 회식한다 하면 도망가기 일쑤였다. 월급은 안정적이었고, 근무시간도 5시까지라 시간적 여유도 있는 직장이었다.
결혼해서 아이 낳고 평범하게 사는 게 허무하게 느껴졌던 젊은 시절이었다. (간이 배 밖에 나왔었나 보다)
내 인생을 전부 투자하면,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 믿어지는 분을 만났다. 나는 모든 것을 버려두고 그곳으로 뛰어들었다. 내 나이 30살이었다. 눈에는 불꽃이 타올랐다. 심장은 기대와 흥분으로 충만했다. 정말 멋지고 훌륭한 삶을 시작하는 기분이었다.
오늘 나는 25년 간 사역했던 예수전도단에서 사직했다. 월급도 안주는 선교단체에서 25년간 잘 살았다. 거지가 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수시로 들었는데, 기도하면서 늘 말씀으로 불안함과 두려움을 물리치고 살았다. 그리고 그 말씀은 언제나 실제가 되어 내 삶에서 역사했다.
25년의 삶을 돌아보니 모든 것이 은혜였다. 삐뚤빼뚤했던 나의 모난 성격이 조금은 동글동글해졌다. 자로 잰 듯한 형식과 규율 안에서 판단이 자동이었던 나의 뇌구조는 유연해졌다. 함께 생활하고 기도하고 성경말씀을 삶에 적용하면서 모난 부분도 깎이고, 생각도 유연해진 것 같다.
2년이 넘는 안식년을 가지면서, 나를 돌아보았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발견하는 시간을 가졌다.
안전한 곳에 머물기 위해 마음도 없이 종교적인 행위만 하며 살고 싶지는 않았다. 많이 고민하고 기도했지만, 결국은 이 길을 가야 한다고 결론지어졌다.
사직하는 심정은 벼랑 끝에서 뛰어내리는 심정이다. 앞이 안개 낀 것처럼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나는 뛰어내리려 한다는 고백으로 사직의 뜻을 전했다.
내가 행복하고 활력 있어 보이기에, 나를 볼 때마다 잘 지내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고, 하나님도 자기 자녀가 그렇게 지내는 것을 좋아할 것이라며 리더는 나를 축복해 주었다. 일 년 전에 불허된 나의 사직서에 적힌 리더의 의견을 오늘에서야 보게 되었다.
'건강과 다음 진로를 위해 시간이 더 필요해 보입니다.'
떠날 때가 되어 보니, 이런 리더가 어디 있겠냐 싶다. (지난 6년간 내 일기장에 흩날리는 글씨로 많이 나왔던 리더였는데)
나의 삶이 진하게 녹아있는 선교단체를 떠난다고 내 입으로 말하는데, 울컥하며 눈물이 났다. 내가 진짜 떠나는구나! 이제 정말 뛰어내리는구나! 그간의 세월에 대한 감사가 솟아올랐다.
간사들이 그동안 나와 함께 사역하면서 느꼈던 점을 말하는데, 다들 나의 모난 점은 쏙 빼고 장점만 이야기해 주었다. 용기와 열정, 잘못된 것을 기꺼이 수정하려는 마음, 생각을 바꾸려고 하는 유연함, 유머, 말도 잘한다는 폭풍칭찬으로 떠나려는 나를 격려해 주었다. '보고 싶을 거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라.' 이런 말로 나를 잘 보내주었다. 이런 좋은 사람들을 어디 가서 또 만날 수 있을까, 이런 대화를 이제 어디에서 할 수 있을까 싶다.
나의 모난 점에도 불구하고, 25년간 나와 함께 사역해 준 사람들이 참 고맙다.
다 같이 모여 축복해 주고 기도해 주니 마치 조촐한 은퇴식을 하는 기분이었다. 직장생활 오랫동안 하고 은퇴하는 사람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간다.
이제는 소속이 없는 자유인이 되었다. 소속이 없는 것이 홀가분하면서도 휑하다. 휑한 나의 시간에 하나님께서 또 어떤 것으로 채워주실지 궁금하기도 하다.
세월은 값진 경험과 그에 대한 감사로 채워진다.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어려움이라도 기도하며 하나씩 해결해 갔던 순간들이 쌓여, 반짝반짝 빛나는 지혜와 용기가 되었다. 감정에 휘둘릴 때는 보지 못했지만, 한 발짝 물러서서 보게 되니 그 시간들이 감사하게 느껴졌다. 감사의 마음이 옹달샘처럼 가슴속에 차오른다.
은퇴는 나의 노력과 성과를 기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감사해야 하는 시간이다. 나를 또 다른 곳으로 파송해 주는 귀한 나의 동료들이 있어 감사하다. 마음은 내리는 비처럼 촉촉하고 차분해진다.
독립이다. 이제부터는 진짜 주님과 나 둘 뿐이다.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며 예배하는 삶이 나의 목표다.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오늘도 주님 앞에 엎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