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발자국

by 사랑의 빛


올해~

엄마 밭에는

아주 오랜만에

고추가 심겼다.


좁은 고랑 사이

허리를 구부리고

무릎을 쭈구리며

빨간 고추를 잡아 따는 건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크게 농사짓는 집들에 비하면

많지 않은 양이지만

아무리 적어도

여자 혼자 농사짓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래도

생계가 걸려 있고

홀시어머니 봉양하며 사는 엄마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해야만 했다.


힘들어 놓았던 고추 농사를 다시 하게 만든 건

배 보다 배꼽이 커지는 물가도 한몫을 한 것 같다.



어느덧

태양초에 무관심한 세대 자라 올랐다.


고추가루 양념 한가득 버무린

최고의 자연 발효 식품인 김치지만

밥상에 김치 없이도 잘 먹는 세대가 되었다.


우리 세대가 더 올라간 어느 날엔

집에서 김치 담가 먹는 건

제법 신기한 일상이 될 수도 있 것 같다.


매운 맛 좋아하는 한국인들의 입맛 정서에

빠질 수 없는 고추...


농업용 건조기 없는 엄마는

아직

뜨겁게 달궈진 마당 위에 기다란 포장을 깔고

가을볕 아래 빨갛게 익은 고추를 풀어놓는다.


빨갛게 익은 고추가

반짝반짝 예쁘게 마르기 쉽지 않은데

유난히 비 내리는 날이 잦은 올해

병충해를 견디고 잘 익은 고추가 감사하다.



추적추적

가을비가 제법 내리는 날,

유모차를 밀며 빗길을 걸으니

어느 한 곳도 발자국이 남지 않는다.


문득,

엄마의 가을이 남기는 발자국을 생각한다.



빨갛게 익어 오른 고추,

마당 펜스 아래 익어 내린 호박,

알알이 붉은색으로 입혀진 구기자,

툴툴 떨어져 발그레 매끈한 얼굴을 내민 ,

한 낮 해님 사이 보란 듯이 피어 준 초록 깻잎,

땅 깊은 어둠 속에서 빗 물을 머금고 자란 고구마,

작은 논바닥 위에 고개를 내밀고 추수를 기다리는 ,


들판에 익은 곡식들이

엄마의 가을에 남겨지는 발자국이다.


붉게 물든 가을 향기가

이토록 곱고 아름답다는 걸

엄마의 걸음을 뒤쫓는 가을 길에서 배운다.




엄마의 인생 가을에 맺힌

나 라는 열매

그처럼

아름답고 풍성하게

잘 익은 발자국으로 남겨지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