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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랑의 빛 Aug 28. 2023

엄마의 뜨거운 여름

1. 너를 기다린 여름


 나는 한 번도 엄마가 꿈인 적이 없었다. 세상 어떤 여자가 엄마를 꿈꾸며 살까..
 나 역시 여느 여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게 1,20대 푸른 청춘에 내 이름 세 글자가 빛나는 어느 날의 향기 나는 그때를 꿈꾸고 살았다.
 그랬던 나는 신랑을 만나 결혼 한 지 10년째 되던 2021년 여름, 어느새 엄마를 꿈꾸고 있었다. 그 여름 둘째를 품기 위해 병원을 옮기기로 결정하고 난임 검사 결과 좋지 않은 내 몸 상태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상의 노력을 시작하며 준비했고 그해 가을 새능이를 품게 되었다.
 한 번도 엄마를 꿈꾸지 않았지만, 결혼 후 10년 동안 복중에 품고 가슴에 묻은 생명이 다섯인 나는 어느새 엄마가 꿈이 되어 있었다. 동생을 원하는 첫째의 간절한 바람은 어쩌면 설득과 인정을 위한 내 핑계요 엄마가 되고도 엄마가 고픈 내 꿈의 도피처였을지도 모른다. 나 외에 어느 누구도 임신과 출산을 지지하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친정엄마도 결코 찬성하지 않으셨다. 내가 원하니 말리지는 못해도 병원을 오가는 내 소식을 전할 때면 하나 있으니 그만해도 된다며 말끝을 흐리곤 하셨다. 반복되는 유산에 17주 중기 유산까지 한 딸의 임신을 지지할 친정엄마는 없을 것 같다. 딸을 걱정하는 엄마의 마음을 너무 잘 알기에 반대하셔도 크게 서운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2년 전 여름은 내게 가장 전투적인 여름이었다. 임신을 위해 병원행을 고민하며 반년을 보내고 신랑과 상의하며 병원을 옮기기로 결정하기까지 그해 여름 한철이 다 지났다.
몸을 추스르고 마음을 다독이고 생명을 기다린다는 핑계로 놓았던 일.. 다시 복귀했지만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 가정 방문 수업의 수요는 크게 늘지 않았고 그 일만 고집할 수 없어 재택근무를 지원해서 집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나라의 지침과 원내 상황에 따라 유치원 등원도 안 하는 날이 더 많았던 날들, 온종일 집에서 꼼짝없이 갇혀 육아를 하며 오후부터 9시까지 근무하며 내 잡은 고사하고 아이와 신랑 저녁 식사 챙기기도 정신없었다.
 하루는 전 세입자가 두고 간 에어컨이 수명을 다해 냉각기 고장으로 더운 바람을 뿜어대기 시작했다. 1년 뒤 이사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선풍기 한 대로 여름을 버틸 생각이었다. 더위를 별로 안타는 나는 그럭저럭 견디는데 아침부터 푹푹 찌는 날씨에 외출도 못하고 종일 에어컨 없는 집에서 땀으로 목욕하는 아들, 퇴근 후 집에 들어오면서부터 땀을 흘리며 힘들어하는 신랑.. 어른이야 어떻게든 견딘다고 하지만 코로나와 함께 에어컨 없는 집안은 그야말로 창살 없는 감옥이나 다름없었다. 고집스러운 나 때문에 삼복더위를 그렇게 더위와 땀과 전쟁을 치른 후 아이가 너무 힘들어해 더 이상은 버틸 수 없어 스탠드 에어컨을 주문했다.
 다세대 주택에서의 에어컨 설치는 이것저것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많은데 더 세심히 살피지 못한 부분에서 일이 터졌다. 실외기 사이즈 때문에 외벽 설치도 무리였지만 배관과 설치비용을 줄이겠다고 놓았던 실외기 자리 때문에 난리가 났다. 인버터라 소음이 정말 거의 나지 않고 제습으로 15분 오전에 잠깐 돌렸는데 지층에 사시는 세대 분께서 시끄러워 머리가 아프다, 왜 설치할 때 상의 없이 했느냐, 실외기 자리가 내 머리 맡이니 옮겨라.. 어른과 다툴 생각도 없고 그럴 여유도 없었던 터라 신랑에게 연락하고 다시 설치 기사님을 요청해 재 설치에 들어갔는데.. 이번에는 옆 주택 지층 세대가 난리가 났다. 양쪽 지층 세대분과 설치기사님까지 여름 땡볕 벌건 대낮에 고성이 오가고 그야말로 순식간에 싸움이 났다. 어른들 다투는 소리에 놀란 아이까지 내려와 무슨 일이냐 묻는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도무지 어찌해야 하나 싶은 나는 결국 눈물이 쏟아졌다. 이런 기막힌 상황.. 내 눈물을 쏙 들어가게 만든 건 아이의 한 마디였다. 어른들 다투는 모습을 보이는 게 좋지 않아 올려 보낸 아들이 안방 창문에 기대어 외쳤다. “아니 그래서 도대체 어디에 설치하라고 이 난리들이야!!” 맙소사.. 순간 나는, 울어야 하나 웃어야 하나.. 어린 아이의 눈에도 어른들 오가는 큰소리가 이해불가였나 보다..
 결국 옆집, 아랫집 모두에게 만족(?)스러운 위치를 찾아 겨우겨우 실외기 설치를 했는데 배관 길이가 가관이었다. 에어컨 본체부터 실외기까지 외벽을 돌고 감싸 설치된 배관은 15미터였다. 상상.. 그 이상이었다. 기본 배관 5미터면 충분했는데 무려 3배가 되었다. 배관 비용만 실외기 하나 값이 나왔으니.. 나를 포함한 관련된 모두가 자신의 입장을 내세우며 조금도 배려하려 하지 않고 이해하려 하지 않는 상황을 마주하며 사람 공부, 인생 공부를 아주 혹독하게 했던 날, 그 여름을 잊을 수 있을까.. 그렇게 이글거리는 햇볕만큼이나 지독했던 날들이 새능이를 만나기 위해 준비하기 시작했던 여름이 지났다.
 지난해는 봄이 짧고 유난히 여름이 뜨겁고 습하고 길었다. 보통 5월까지는 봄이었는데 작년에는 5월 중순부터 한 여름처럼 태양이 이글이글 타올라서 도시마다 이른 더위로 크게 몸살을 앓기도 했다. 여름, 삼복더위 코앞이 출산 예정일이었던 나는 새능이가 태어날 때는 얼마나 더우려나~ 하면서 여름 아기는 어떻게 키워야 하나~ 걱정을 했다.
 출산 예정일을 한 달 보름 즈음 앞두고 무더워지는 날씨에 이사를 했다. 투룸으로 이사한 지 반 년 만에 급하게 서두르느라 이사 업체를 알아보고 이사하기 이틀 전날 입주 청소 업체를 계약하는 숨 가쁜 날들이었다.
 21년도 가을날 우리 가족에게 찾아와 준 아기 천사 새능이를 기다리는 동안, 여름, 가을, 겨울, 봄까지 4계절을 지나 다시 여름이었다. 가을에 만난 새능이는 겨울을 보내며 가장 무서운 16주를 무사히 자랐고 살아 있는 생명의 힘을 태동으로 확실하게 확인시켜 주며 봄을 지켜주며 무탈하게 만날 여름을 맞이해 주었다. 예정일은 7월 12일,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여름의 한가운데였다.
 임신 극 초기를 지나고 운동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 초반부터 수축이 있어 가벼운 산책도 쉽지 않았는데 중기부터는 조금만 걸어도 금방 배가 뭉치고 힘들었다. 정기 검진 때 말씀드렸더니 밖에서 보아도 배가 많이 아래로 내려와 있다고 산부인과 선생님이 무조건 36주는 버텨야 한다고 엄중한(?) 경고를 하신 상태였다.
 4월 말까지 재택근무를 하며 하루 일곱 시간은 앉아 있었는데 보통 임신부들이 출산 직전까지도 일을 하는데 이 정도로 힘든 게 있나~ 싶었지만 내 몸은 제법 힘이 들었나 보다.
 새능 이를 기다리는 여름을 앞둔 어느 날 아침이었다. 쉬엄쉬엄해라, 조심히 다녀오라고 인사하며 신랑 출근길을 배웅하고 돌아서서 새힘이 아침밥을 먹이기 위해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내고 있었다. 압력솥에 밥을 해 놓고 누룽지를 끓여 새힘이 앞에 놓아주고 뒤돌아서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내 문을 닫으려는데 순간 머리가 피잉~ 돌면서 내가 들이마신 산소가 머리까지 도착하지 않는 것 같은 답답함과 함께 숨을 위어도 쉬어지지 않는 순간, 어~ 어~ 어지럽다~ 하면서 주방 바닥에 쓰러졌다. 잠시의 시간이 지나고 겨우겨우 나오는 목소리로 새힘이를 부르며 아빠에게 전화를 하라고 신호를 보냈다. 눈치 빠르고 겁 많은 우리 새힘이는 바로 알아듣고 아빠에게 전화를 했는데 안 그래도 바쁜 아침 시간, 아들이 아빠 보고 싶어 장난 전화 하는 줄 알고 전화를 받지 않는다. 끊고 다시 하고, 끊고 다시하기를 반복하던 중, 신랑이 전화를 받으니 새힘이가 “아빠~” 부르고 말을 하려는데 신랑이 아빠 바빠서 지금은 통화 못하니까 나중에 다시 하자하고 전화를 끊는다. 아이고.....  마음이 급해진 새힘이는 바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 신랑이 받지 마자 “엄마가 쓰러졌어요. 숨을 안 쉬어요”  그제 서야 우리 신랑은 아이의 말을 알아듣고 놀라서 엄마를 흔들어 깨우라고, 숨 쉬는지 물으며 혼비백산이 되었다. 새힘 이에게 영상으로 다시 할 테니 엄마 숨 쉬는지 확인하라며 영상통화를 연결해 내 상태를 확인한 우리 신랑은 지금 갈 테니까 엄마 괜찮은지 말해달라며 전화를 끊었다. 신랑이랑 전화가 끊어진 1분 사이, 새힘 이는 마음이 많이 불안했는지 시골에 계신 친정엄마.. 외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할머니, 엄마가 쓰러졌어요. 숨인 안 쉬어진대요. 할머니 언제 와요?” 쉴 틈 없이 쏟아냈다. 우리 엄마.... 얼마나 놀라셨을지... 초기를 넘겨 안심할 즈음 코로나19에 놀라고 이제 좀 괜찮나 싶었는데 아침에 쓰러졌다니.. 그것도 여덟 살 손주에게 전화를 받으셨으니 얼마나 철렁 내려 앉으셨을까 생각하면.. 그저 한 없이 죄송할 뿐이다. 직장에서 집까지 오면서 영상통화를 켜고 “자기야~ 자기야~” 극도의 흥분 상태로 나를 불러대던 신랑의 다급한 목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생생하게 기억된다.
 신랑 도착할 즘 나도 몸을 가눌 수 있을 정도로 컨디션이 돌아왔다. 신랑은 집에 오자마자 내 상태부터 확인하는데 아이가 그제야 안심이 되었는지 무서웠던 한 시간의 기록을 쉴 새 없이 나열하기 시작했다. 복중 새능 이는 괜찮은지 병원을 다녀와야 할 것 같은데 다니던 산부인과에 전화를 하니 바로 진료도 어렵고 인근 가까운 산부인과도 전화를 해보니 다니던 곳으로 가란다.
우선, 새힘이부터 등원을 시키려고 하는데 가지 않겠단다. 엄마 병원 가야해서 얼른 등원부터 해야 한다고 하니 그럼 엄마는 언제 오는지, 나는 어떻게 혼자 있는지, 시골 할머니는 언제 오시는지 질문 세례가 쏟아졌다. 그날 밤 새힘이는 나를 끌어안고 엄마 죽는 줄 알고 너무 무서웠다고, 자기를 혼자 두지 말라고 대성통곡하며 울었다. 엄마가 새힘이 혼자 안 둔다, 그런 적 없다 하니 3년 전 일을 이제야 꺼내놓는 아들.. 동생 보고 올게~라고 말하고 아침에 헤어졌는데 나는 그날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었다. 복중에 있던 새힘이 동생이 17주에 하늘나라 천사가 되어 병원에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새힘이는 그날의 기억이 트라우마처럼 남아 있었나 보다. 그동안 짐작은 많이 했었지만 한 번도 직접적으로 말한 적이 없었는데.. 아이 입으로 직접 들으니 12월, 이듬해 2월 차례로 보낸 쌍둥이 생각이 또 나서 새힘이를 안고 많이 울었다. 새힘이에게 미안하고 잃은 생명에게도 미안하고.. 시간이 지나면 조금은 옅어질까 싶은데 좁은 가슴 어딘가에서 맺힌 눈물이 자꾸 흘러내린다. 어쩌면 그 아픔 때문에 엄마가 꿈이 되어버렸을지도 모르겠다. 뭐 그런 인생을 사냐 싶겠지만, 살아보니 알겠더라.. 엄마의 날을 살아가는 오늘이 얼마나 귀한지... 오늘도 누군가는 그토록 원하고 목숨을 다해 노력해도 살 수 없는 그날을 품고 묻으며 하루를 견디고 간다.
 출근 30분도 안되어 아이 등원 시간에 쓰러진 이후, 계속되는 입덧으로 잘 먹기 못해 빈혈을 달고 살았다. 몸이 무거워질수록 극소량의 음식 섭취에도 소화불량이 심해서 음식 먹는 게 세상 곤욕이었다. 그렇게 나는 만삭의 몸으로 업무 때문에 부재중인 신랑을 대신해 재택근무와 첫째 양육에 이사 준비까지 하루 24시간이 부족한 일상을 보내며 새능이 만날 여름 초입에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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