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들어 예고치 않은 눈이 자주 내리곤 한다. 새하얀 함박눈이 세상을 덮는 것을 바라보고 있자면, 어느덧 서른 중반을 달려가는 나는 마냥 좋아하기보단 귀가 길을 걱정한다.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희고 흰 눈을 바라보고 있자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사실이다.
눈을 바라보고 있자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지난여름 세상을 떠난 아빠다.
“와! 아빠, 우리 여기까지 올라오길 잘했다!”
세 딸 중 유일하게 등산과 운동을 즐기는 나는 아빠와 주말에 종종 산을 타곤 했다. 유독 경치가 좋은 산에 오를 때면, 아빠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다음에 아빠랑 눈 내릴 때 또 오자. 여긴 설산 일 때가 더 예뻐.”
아빠는 유독 눈이 온 풍경을 좋아했고, 눈이 많이 내린 주말이면 엄마의 걱정 어린 잔소리에도 불구하고 꼭 나와 함께 산에 오르고 싶어 했다.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등산화에 아이젠을 장착하고, 함께 정상에 올라 나눠 마실 따뜻한 커피를 준비하는 아빠와 나는 눈을 밟으며 참 행복했다. 사박사박 밟히는 소리에 밝게 웃고, 신이 나 보이기도 했던 아빠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눈이 왔으니 더 좋다던. 더 아름답다던. 더 감사하다던 아빠의 모습이 어떻게 지워지겠는가. 흰 눈에 찍힌 우리 두 사람의 발자국만으로도 아빠는 이가 다 보일 정도로 웃곤 했고, 나는 그런 아빠의 어린아이 같은 모습을 참으로 사랑했다.
일이 있어 삼청동까지 외출을 했던 어느 날이다.
“밖에 좀 봐! 어머, 세상에!”
꽁꽁 언 몸을 녹이기 위해 잠시 좋아하는 카페에 들렀던 나는 주위 사람들의 아우성에 무심코 창밖을 바라보았다. 자세히 보지 않아도 주먹만 한 함박눈이 세상을 빠르게 뒤덮고 있는 것이 아닌가. 눈은 특별한 예고도, 기척도 없이 순식간에 찾아와 주위를 온통 흰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삼청동 특유의 고즈넉함과 백설기처럼 고운 눈이 어우러진 풍경은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나는 주문한 드립 커피의 향을 맡으며 잠시 넋 놓고 눈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아주 오랜만에, 나는 처음으로 다시 행복을 느꼈다.
잊고 있었네.
맞다, 나도 눈을 좋아했지.
차디찬 공기에 눈설레를 헤치며 걷게 될지언정, 나도 유독 드립 커피가 입에 맞는 겨울을 참 좋아하지.
잠시 후에 카페를 나선 나는 고작 몇 분 사이에 거침없이 쌓인 길눈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많은 눈이 쏟아져서였을까. 평일에도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과 관광객으로 붐비는 종로 거리가 그새 조용해졌다.
덕분에 나는 아무도 밟지 않은 길에 내 발자국을 처음으로 찍어낼 수 있었다. 숫눈을 한 발자국, 두 발자국 걷자니 그게 왜 그리 좋았는지 모른다. 그게 뭐 그리 즐거웠는지, 나는 앞으로 나아가면서도 뒤에 남겨진 발자국들이 오로지 나의 것임을 자꾸만 확인했다.
그때였다.
다시 행복할 수 있단 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 것이.
흰 도화지에 내 발자국만 실컷 찍어 낸 게 마음에 걸렸던 것이.
나는 아빠를 잃고, 내가 다시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 기쁨을 느끼거나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는 있더라도, ‘행복’을 느끼긴 쉽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행복’이라는 것 자체가, 그 깊이가 다른 느낌 또는 감정이 아닌가. 내가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게 된 바탕의 인물이 사라졌는데, 과연 내가 정말 다시 행복할 수 있을까? 나는 의심했었다.
하지만 예상외로, 나는 그 후에도 조금 민망할 정도로 꽤나 쉽게 행복을 느꼈다. 시간이 지나자, 행복은 각기 다른 크기로 나의 마음을 찾아와 두드리곤 했으니까.
오래간만에 팔을 걷어 부치고 한 요리를 내 막내 동생이 맛있게 먹을 때,
밤을 새울 정도로 마음을 빼앗긴 책을 읽었을 때,
또는 어여쁜 것을 본 엄마의 웃음소리를 들었을 때,
나는 잠시 행복했다.
지금도 가랑눈이 흩날리며 내리는 중이다.
나 홀로 다시 행복할 수 있다는 게 미안해, 아직은 나 스스로 그 감정을 접어버리곤 할 때가 종종 있다.
하지만 이 글을 쓰는 오늘도, 산 위의 눈을 밟던 아빠가 떠올라 나는 잠시 행복했다.
아빠도 지금, 나와 같은 눈을 맞고 있을까?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