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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지은 Jan 24. 2024

어떤 인연

소중한 시작


그녀의 이멜을 받은 것은, 창으로 보이는 로키산맥 봉우리에 하얗게 눈이 내려 있고, 추수 감사절이 막 지난 후였다. 잠에서 깨면 물 한잔을 마시며 컴퓨터를 연다. 밤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궁금해 여기저기를 기웃거린다. 혼자 웃기도 하고, ‘어머 이런 일도 있었네’ 중얼거리기도 한다.  어느새 남편이 갖다 주는 블랙커피에서 진한 커피 향이 올라온다.


그날도 식어가는 커피 한 모금을 천천히 음미하며 이멜을 열었다. 제목은 <안녕하세요. 작가님!>이었고 발신자는 모르는 이름이었다. 누굴까? 옆에서 누가 봤더라면 내 눈은 잠시 빛나며 궁금증으로 동그래지지 않았을까? 내가 사는 곳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인 덴버 근교에 사는 한국 간호사라고 소개하며 한국에서 내 책을 읽었다고 했다. 책을 구입할 당시에는 친정인 부산에 있었고 연말에 미국으로 돌아올 예정이란다. 꼭 한번 만나서 나의 이야기 듣고 싶고 구매한 책에 친필 사인을 받고 싶단다. 책을 읽은 후, 출판사에 연락을 해서 나의 이멜 주소를 알게 되었단다.  한국에서 간호사 생활을 5년쯤 했고 미국 간호사로 15년째.


간호사가 쓴 이야기들. 너무나 공감이 되고, 감동을 받아 울면서 책을 읽었다는 그녀. 출판사에 직접 전화를 해서 나의 이멜을 알게 된 그녀의 성의가 감사했고, 지척에 살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선생님의 팬으로부터…’라는 이멜의 말미를 읽으며 바로 답을 했다.  공감, 완독, 팬심까지 모든 게 고맙다고.


그녀가 콜로라도에 돌아왔다는 연락을 받았다. 처음 만나기로 한 날은 그녀 아이들의 베이비 시터가 코로나에 걸려서 약속을 미뤘다. 그다음 약속 날짜에는 폭설로 꼼짝을 할 수 없었다. 자연히 또 연기. 오늘이 그 세 번째 약속이었다. 약속 장소는 부산 아지매가 좋아하는 순대국밥집. 오랫동안 알고 지냈던 사람들처럼 이야기는 신이 났다. 서로 미국에 오게 된 동기를 이야기했고, 아이들 키우는 이야기를 했고, 병원에서 일하며 겪는 어려움과 이민의 아픔등을 공유했다.

시간 가는 줄 몰랐던 수다. 나는 이미 퇴직을 했고 그녀는 아직 현직에서 일을 하는 젊은 간호사. 세대 차이가 나도 한참 났지만 사는 일의 공통분모는 늘 존재했다.  3시간 동안 이야기를 했지만 헤어지는 시간은 참 아쉬웠다. 그녀는 아이들 픽업 시간에 맞추어 자리를 뜨며 다음을 약속했다. 나도 아이들과 남편과 함께 우리 집으로 한번 초대하겠다는 약속 잊지 않았다.

어느 따뜻한 날, 소풍을 오는 것처럼 우리 집에 들러준다면, 정성껏 준비한 한상 차림 앞에 놓고 살아왔던 이야기 두런두런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인생의 선배로서, 간호사의 선배로서, 이민생활의 선배로서 더 해 주고 싶은 말들이 꽤 있지 않을까?


마음은 벌써 그 시간을 향해 달려간다. 서로에게 힘이 되는 인연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 산정의 흰 눈은 마을까지 이어지고 설국의 풍경들은 포근하게 가슴에 안긴다. 바람에 흔들리는 앙상한 나목마저 정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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