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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지은 Feb 10. 2024

다시 그곳에

다시 강릉 2


지난 몇 년 동안 강릉에 나와 있을 땐 위촌리 언덕길을 거의 매일 다녔다. 처음엔 택시로, 그다음엔 친구가 데려 다 주었고, 가끔은 버스를 타고 가서 언덕길을 걸어 올라가기도 했다. 그런 시간이 4년. 작년엔 그 친구가 차를 내게 빌려주었다. 보험까지 들어주며. 손사래를 치며 괜찮다고 해도, 마음속으론 얼마나 편해질까 싶어 너무 고마웠다. 미국에서 이미 국제 면허를 받아온 터라 친구를 옆에 태우고 시내 운전을 몇 번 해보니, 강릉 시내 운전은 할 만했다.


요양원에 가신 엄마는 코로나 시기를 지나며 점점 더 쇠약해지고 지난해 2월에는 대퇴부 골절도 생겼다. 응급 상황이 생기자 자기 차를 빌려준 친구가 너무나 고마웠다. 택시를 부르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않아도 됐다. 엄마의 응급상황 이후 거의 매일 요양원이 있는 언덕을 올랐다. 내가 거주하는 곳은 바닷가 근처, 시내의 가장 동쪽이고 엄마가 계셨던 요양원은 시내의 서쪽 외곽. 엄마의 기억력은 이미 희미해지고 통증을 느끼지도 못하게 치매는 진행되어 있었다. 대퇴부 수술을 거부하고 요양원으로 퇴원을 하며 ‘이게 잘하는 일’인지 잠시 갈등을 했지만, 난 모진 결정을 했다. 수술 후 깨어난다는 보장이 없고, 수술 중 걸게 될 인공호흡기를 과연 제거할 수 있을지? 설사 수술이 잘되어 깨어난다고 해도 긴 재활을 할 수 있을지도 염려되었다. 자신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엄마가 과연 재활이 될까? 나의 판단으로는 물리치료사의 지시를 전혀 따를 수 없는 치매 중증이었다. 당신의 이름도, 딸의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엄마가 수술 후의 지시를 따른 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엄마가 늘 원하셨던 “편하게 가는 일”을 준비하며 요양원으로 퇴원을 결정하였다.

엄마는 요양원의 누울 수 있는 차를 타고, 나는 뒤에서 그 차를 따라갔다. 시내를 벗어나 언덕이 보이자 눈물이 쏟아졌다. 짙은 안개가 낀 것 같은 시야.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되어 흘렀다. 얼마나 더 이 언덕을 오를 수 있을지. 생각은 거기에 머물렀다.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고 심호흡을 하고 엄마가 침대에 눕는 것을 보고 요양원을 떠났다. 날은 이미 저물었고 언덕 아래로 보이는 작은 도시의 불빛은 그렇게 빛나고 있었다. 흔들리는 불빛들은 선명했다 흐렸다 하기를 반복하는 나의 시야. 가슴은 칼로 베이듯 아팠다. 마침 절친은 서울에 가 있어 누굴 불러 통곡을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겨우 집에 도착했고, 아파트 현관에 들어서자 집안에는 한기가 가득한 것 같았다. 그 차가움. 스웨터를 껴 입으며 실내 온도를 체크했다. 늘 맞추어 놓았던 대로 23도. 거실에 펴 놓았던 전기장판을 올리고 이불을 끌어 어깨를 덮으며 목놓아 울었다. 얼마를 그렇게 훌쩍거리고 나서야 미국의 남편에게 전화를 걸 수 있었다. 상황 설명을 하고 가능하면 빠른 시간 내에 한국에 와야 할 것 같다는 이야기도 했다.


요양원에서는 엄마의 옆자리 침대를 비워 내가 방문을 했을 때는 편안하게 걸터앉아 쉬게 해 주었고, 식사 시간이면 직원 식당에서 원장님과 같이 식사를 했다. 그렇게 수시로 요양원을 방문했고 노심초사하며 일주일이 지났다. 엄마의 상태는 급격히 나빠졌고 남편도 강릉에 도착했다. 남편에게 당부의 말을 하고 싶으셨던 건지, 남편이 도착하자 엄마의 상태는 급 호전되는 것 같았다. 열도 떨어지고 기저귀를 갈기 위해 돌려 눕히거나 해도 얼굴 한번 찌푸리지 않으셨다. 왼쪽 발가락을 제외한 다리 전체에 석고붕대를 하고 있었는데 ‘아야’ 소리 한번 안 하셨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중증 치매는 고통도 잊게 하는 가 싶기도 했다. 내가 아는 상식과는 전혀 다른, 고통을 호소하지 않는 것이 다행스럽기도 했고 고맙기도 했다. 만약 엄마가 고통스러워하시면 수술을 받지 않겠다고 서명을 했던 나의 결정이 흔들렸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2주가 지났고 엄마는 그렇게 안정을 찾아갔다. 물과 영양 단백질도 곧잘 받아 드셨다. 남편은 2주 후 돌아갔다. 위기 상황이 다시 생기면 금방이라도 또 돌아온다는 약속을 했다. 절친 부부가 옆에 있고 외사촌 부부가 서울에 있으니 안심하고 간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 후 2 달반 동안 거의 매일 그 언덕을 올라갔다. ‘오늘이 마지막으로 이 언덕을 오르는 날일까?’라는 생각을 수도 없이 하면서. 엄마의 옆 침대는 늘 비어 있었고 그곳에서 낮잠을 자기도 했고 밤을 새우기도 했다. 엄마와 못했던 이야기, 혼자 주저리주저리 풀어놓으며 나의 마음속에 쌓여 있던 미안함과 죄송함의 앙금을 조금씩 걷어냈다. 할 이야기가 없으면 엄마가 좋아했던 노래를 작은 목소리로 부르기도 했다. 엄마의 애창곡 ‘나훈아의 영영’을. 속삭이듯 불렀다. ‘잊으라 했는데 잊어 달라 했는데…’ 엄마를 잊으라는 말 같기도 했고 새삼 유행가 한 구절의 의미가 크게 다가왔다. 작고 뼈만 앙상했던 엄마의 손. 그래도 따뜻했다. 잡고 있었고 조물조물 만지기도 했다. 나 스스로의 위안이었을 뿐이지만 지나고 보니 그 시간들이 참 감사했다.


그렇게 함께 하지 않았다면 미국과 한국을 오갔던 4년의 시간이 큰 의미가 없었을 수도 있다. 큰일도 내가 와 있는 동안에 났고, 내가 결정해서 수술을 하지 않았고, 엄마 계시는 동안 남편도 왔었고, 아이들도 왔었다. 외사촌 부부도 몇 번을 왔다 갔고 절친부부도 늘 옆에 있었다.


4월의 마지막 날. 엄마는 편안하게 천상으로 돌아가셨다. 요양원 자신의 침대에서. 병원응급실에서 사망 진단서를 받고 영안실로 모시고 장례 절차를 시작하며 이제 그 언덕길을 오르지 않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그 후 한 번도 그곳에 가지 않았고, 주위를 지나는 일조차 애써 피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내 감정의 봇물을 잘 가두어 두었다. 

작년 7월 나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었고 며칠 전 다시 강릉에 왔다. 그리고 엊그제 그곳을 방문했다. 절친의 엄마가 계신 곳이기도 하기에. 명절 직전이라 요양원엔 방문객이 제법 많았다. 방문객들을 바라보며 작년 봄까지의 나의 아픔이 희미하게 올라왔다. 복도의 게시판에서 발견한 엄마의 이름. 색동저고리에 색칠을 한 것. 이름이 또렷하고 색칠도 선 안에만 정확히 칠해져 있었다. 이름을 보며 다시 울컥한다. 요양원 건물 곳곳에 남아 있는 엄마의 흔적. 엄마의 마지막 집. 지금 엄마가 있던 침대는 모르는 어느 어르신의 이름이 붙어 있겠지만 내게는 4년의 아픔이 고스란히 모여 있는 곳. 그곳을 다시 한번 올려다보며 창가에서 엄마가 손을 흔들고 있는 듯한 환영을 뒤로하고 언덕을 내려온다. 신호등에 서서 룸 미러로 보이는 건물엔 엄마의 그림자가 아직 따스한 온기로 남아 있다.


언제 또다시 이 언덕을 오를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가슴속의 아픔이 좀 덜어졌을까 생각해 본다. 조금씩 익숙해지고, 조금씩 타협하고, 조금씩 편해지는 시간. 요양원이 있는 언덕에 두고 온다. 룸 미러에 내 시선이 머문다, 요양원이 멀어질 때까지…



*사진들은 Pixabay 에서 모셔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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