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연휴가 시작되었다. 뉴스에 따르면 말 그대로 민족의 대이동이다. 40퍼센트 이상이 서울에서 지방으로, 지방에서 서울로, 연휴를 핑계 삼아 해외로 나갔다. 무계획이 계획이었던 오롯이 혼자 맞는 명절. 작년, 같은 시간에도 혼자였지만 그땐 엄마의 상태 때문에 24시간 대기를 하며 긴장했던 탓에 혼자라는 생각을 절감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올해는 빈자리의 무게감이 크게 다가왔다. 절친부부는 남쪽 어디로 골프를 치러 떠났고, 매일 전화를 하는 남편은 한국에서 오는 조카 가족들을 만나러 간다는 이유로 라스베가스에 갔다.
혼자 할 수 있는 일. 문득 보고 싶었던 영화가 떠 올랐다. <<소풍>>
상영관을 검색하고 예매를 하기 위해 앱을 깔았다. 혼자 가는 영화관. 기억도 되지 않을 만큼 까마득했다. 그래, 이럴 때 한번 가보는 거지, 하며 혼자 웃는다.
나문희, 김영옥, 박근형 주연의 영화. 예매 사이트엔 세 사람이 환하게 웃는 포스터가 떴다. ‘16살의 추억을 다시 만났다’는 소제목을 달고. 경로우대 1장을 예매하고 버스를 타기 위해 서둘러 길을 나섰다. 15-20분 간격으로 있다던 버스는 휴일이어서였을까 30분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정류장 끝에서 햇살 바라기를 하며 쌀쌀함을 밀어냈다.
상영관에 도착하자 시간은 넉넉히 남았다. 키오스크에서 입장권 발매를 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대부분 부부 같아 보이는 커플이거나 몇몇이 같이 온 중 노년 여성들이다. 나만 혼자? 싶었지만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때 옆자리에 앉는 또 한 사람. 혼자 온 내 또래의 여자분이다. 맘 속으로 그렇게 반가울 수가…
천상병 시인의 “귀천” ‘나 하늘로 돌아 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이 기억되는, 영화 <<소풍>>은 시작되었다. 영화에서는 나태주 시인의 “하늘 창문”이 뜬다.
‘하늘 창문 열고
여기 좀 보아요.
거기는 잘 있나요?
여기는 아직이에요.
이제는 아프지 말기예요.’
이 영화를 위해 시인이 직접 지어 헌정했단다.
절친이며 사돈 지간인 은심(나문희)과 금순(김영옥), 그 옛날 은심을 짝사랑했던 태호(박근형)의 이야기이다. 요즈음 들어 은심에게는 돌아가신 엄마의 모습이 자주 꿈에 나타난다. 앓고 있는 파킨슨 병세도 점점 악화되어 수전증도 심해지며 거동도 많이 느려졌다. 죽음의 그림자가 목전에 왔음을 깨닫고 우울해 하지만 어디 이야기할 곳이 없다. 그때 마침 금순이 찾아온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금순은 자신의 지병 더 심해져 거동을 할 수 없는 날이 곧 올 것을 알고 더 늦기 전에 친구이자 사돈인 은심을 찾아 상경했다. 은심의 아들이며 자신의 사위인 해웅(류승수)이 아직도 노모에게 손을 벌리고 있는 사실을 목격한다. 은심의 아들 가족이 은심의 집으로 들어오자, 은심은 집을 싸 금순 네로 가출을 한다. 고향에서 옛 친구 태호를 만난다. 태호는 아직도 양조장을 지키며 동네에 사는 터줏대감. 은심이가 첫사랑이었다. 바다와 시장, 작은 언덕의 고향, 남해 평산리에서 일어나는 일들. 시골 인심도 예전 같지 않고 시골 곳곳을 리조트화 하는 요즈음의 문제들을 집고 가기도 한다.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한 각색이었겠지만… 그중 친한 친구 한 사람이 보이질 않았고 그녀의 소식을 궁금해하던 차에 요양원에 가 있는 것을 알게 된다. 셋은 문병을 갔다. 팔다리가 묶여 있고 초점이 없는 시선의 친구를 만난다. ‘절대 요양원 올 생각 하지 마. 자식보다는 여기 있는 직원들이 낫지. 여긴 숨만 쉬는 곳이지 살아 있는 곳이 아니야. 여기 절대로 오면 안 돼, 하고 했던가. 친구들이 사가지고 간 케이크를 앞에 놓자 짐승처럼 손으로 마구마구 먹는 장면. 요양원에서 돌아가신 엄마의 모습이 오버랩되며 눈물을 흘렸다. 옆자리에서도 훌쩍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또 한 장면. 금순과 은심이 아침잠에서 깬다. 금순의 허리병이 도져 꼼짝 할 수 없다. 금순이 장 안에 있는 기저귀를 꺼내 달라고 소리 지른다. 은심이 꼼작 못하는 순심에게 엉덩이를 들고 기저귀를 대주려고 하지만 파킨슨이 있는 은심의 손은 생각처럼 빠르게 움직여지지 않는다. 금순은 누운 채로 대소변을 보게 된다. 은심은 그걸 치워보려 애를 쓰지만 역시 잘 안된다. 파킨슨 수전증이 있는 손으로는. 둘이 그렇게 누워서 한참을 있었고 이어지는 장면은 부엌에서 금순이 고무 대야 목욕통에 들어 가 있고 은심이 친구 금순을 씻겨 주는 장면이다. 어깨에 물을 올리며 두런두런 이어가는 대화가 둘의 찐 우정의 서사시 같다. 대소변이 묻었던 옷을 빨아 널은 장면도 이어진다.
몇 개의 작은 일들이 이어지고 장날, 나물을 팔러 갔던 금순과 은심. 나물을 몽땅 사겠다는 손님을 만나 신이 났을 때 한통의 전화를 받는다. 표정이 확~ 굳는다. ‘태호가 죽었대’ 태호는 뇌종양 말기였지만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다가 은심에게 들켜 버렸다. 그래도 첫사랑이 알게 되었으니 다행인 걸까?
태호의 장례식이 끝나자 은심이 소풍을 가자고 한다. 그러나 금방 떠나지 못한다. 파킨슨에, 허리 통증에, 삭신이 쑤신다고. 결국 그날은 떠나지 못하고 우선 시장에서 금순이 입을 꽃무늬 원피스를 사서 집으로 돌아온다. 며칠 후 둘의 건강 상태가 좀 호전되자 그 옛날 태호와 셋이 갔던 언덕을 향해 오른다. 김밥 도시락을 백팩에 맨 은심. 허리가 많이 구부러진 금순 둘 다 나무 지팡이를 집고. 들꽃이 가득한 좁은 산길. 꽃 길의 풍경이 먼바다와 어우러지며 멋스럽고 아름답다. 산정의 정자에서 김밥을 나누어 먹으며 서로 ‘꼭꼭 씹어 먹어, 김치 쪼매 느올꺼 기랬다’ 등의 대화는 정겹다 못해 눈물겹다. 또 흘쩍거리는데 옆에서도 마찬가지. 뒤쪽에서도 작은 울음소리가 들렸다.
마지막 장면, 바다가 보이는 산언덕 벼랑에 둘이 손을 꼭 잡고 서 있다. 바다를 바라보고 서 있는 두 사람. 임영웅의 노래가 들리고 휘파람이 이어진다.
죽음을 암시하는 그 장면은 압권이었다. 그렇게 함께 손을 잡고 소풍을 마치는 두 사람. 영화가 끝났는데도 아무도 일어서지 않는다. 그만큼 여운이 길고 먹먹했던 때문이겠지. 세상 소풍을 끝내고 귀천하는 그날. 누구에게도 올 일이지만 나는 얼마나 준비가 된 걸까? 어두운 상영관을 빠져나오며 생각이 많아졌다. 엄마를 요양원에 모셨던 나는 살아 있어도 살아 있지 않았음을 배웠고, 숨만 쉬는 공간이더라도 때론 있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존엄사에 대한 질문을 가슴에 안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 오른다. 점심을 걸렀는데 배 고프지 않았고, 겨울 끝자락의 바람이 차지 않았다.
돌아와 혼자인 공간. 좋은 영화 한 편을 보고 와, 상념의 바닷속으로 빠진다. 물은 차갑고 파도는 세지만, 떠나는 그 시간 함께 손잡아줄 친구가 있다면 얼마나 감사한 인생을 살았을까 싶다.
“내는 다시 태어나도 니 친구 할끼다” 한마디가 귓전을 맴돈다. 향긋한 차 한잔 만들어 음악의 볼륨을 올리며 어스름이 지는 저녁 바다를 내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