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가 촉촉이 내리는 저녁. 절친과 둘이 길을 나섰다. 강릉아트센터 소공연장. 아직도 후방 주차가 어려운 나는 멀찍이 차를 세우고 넓은 주차장을 걷는다. 비에 젖은 주차장은 어둡고 습해 한기가 올라왔지만 우리의 발걸음은 가볍고 상쾌하기만 할 뿐. 미리 찾아본 오늘의 프로그램은 체코의 국립 주니어 발레단. 내한 공연은 처음이고 전국 투어가 잡혀 있다. 서울, 통영, 부천 등등.
몇 해 전부터 미국과 강릉을 오가는 생활을 하며, 강릉의 공연장 시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곳을 떠난 지 40년이 되고 있으니 그동안의 발전이야 말로 표현을 할 수 없겠지만 2018년 동계 올림픽을 치르며 많은 발전을 한 것 같다. 아트 센터와 KTX. 이 두 가지가 없었다면 나의 강릉 생활은 조금은 팍팍하지 않았을까?
공연을 좋아하는 나는 이렇게 근사한 곳에서 각종 공연을 감상할 수 있는 게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그리고 절친도 취미가 비슷하여, ‘갈까?’하면 일초의 고민도 없이 ‘오케이’한다. 절친은 티켓 예매의 편의를 위해 연회원에 가입했다. 7만 원의 연회비는 충분한 값어치를 한다. 예매의 우선권이 주어지고 할인도 해준다.
소공연장. 지정석에 앉아 뒤를 돌아보자 빈자리가 꽤 보였다. ‘덜 찼을까?’라는 의문도 잠시 10분 전 벨이 울리자 관람객들은 꽉 찼다. 역시 만석.
무대의 막이 오르고 발레 공연이 시작되었다.
1막은 아담과 이브(Adam & Eve). 구약 성서에 나오는 인류 탄생의 이야기를 형상화한 것. 따먹지 말라고 한 금단의 열매, 선악과를 따먹었고 그것으로 기인된 인간의 갈등을 보여준다. 인간의 본질적인 유혹과 욕망과 갈등은 현재까지 이어지는 인류의 영원한 테마 이기도 하다.
2막은 램(Rem). 수면 중 일어나는 꿈의 상태를 표현한다. 사람들을 누구나 잠을 자야 하고 수면 상태 중 램은 안구와 뇌가 움직이는 상태이다. 잠에서 깨어나면 ‘꿈’이라는 것으로 기억되기도 한다. 그 꿈 안에서 만날 수 있는 모습들과 시계 추 같은 제스처, 얼굴까지 가린 무용수들의 움직임. 무대 뒤 조명이 이야기해 주는 무의식의 세계. 몽환적이면서도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프로그램 설명에서는 “관객은 가장 평범한 것조차도 특별하고 깊은 매력을 지닌 이상한 꿈에서 깨어난 느낌을 안고 극장을 떠나야 한다.”라고 설명한다. 이 작품은 무용수들이 구성에도 직접참여 하여 만들어졌다. 전문 안무가와 무용수들의 아이디어가 합쳐진 작품이라서 여운이 꽤 길었다.
3막은 아름답고 푸른…(On the beautiful blue…). 보통 우리들이 생각할 수 있는 현대 발레. 더구나 요한 스트라우트의 경쾌한 왈츠와 폴카의 리듬에 맞추어 이어지는 춤사위들. 에너지가 느껴지고 발랄함과 경쾌함의 20여분. 유쾌했던 안무와 활기와 재치가 넘치는 민첩한 스텝과 몸동작. 그들이 만들어 내는 에너지는 말 그대로 통통 튀었다.
프로그램에 따르면 브르노 국립 주니어 발레단(Ballet NdB2)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2022년에 창단되었다. 그러나 브루노 국립발레단과 국립 극장과 긴밀히 연계되어있다. 22세 이하의 재능 있는 젊은 무용수와 체코 및 해외 무용학교 졸업생 가운데 발군의 잠재력을 가진 신인 유망주들을 선발하였다. 체코국립무용단과 활발한 콜라버레이션과 발레 마스터들의 서포트를 받고 있는 12명의 무용수들. 그들이 만들어 내는 젊음의 향연에 함께 했던 시간. 젊음의 기를 한껏 받는다.
막이 내리고 오랫동안 이어지는 관객들의 박수 소리에 무용수들은 몇 번이고 나와 커튼콜을 했다. 손바닥이 아프게 박수를 치고 돌아오는 길.
자동차 와이퍼가 리듬을 맞추며 스텝을 밟고, 돌아오는 밤길에는 춤추듯 봄비가 내린다. 봄비와 함께 온 춤의 ‘나빌레라’, 그 안으로 절친의 손을 잡고 나도 들어가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