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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지은 Mar 13. 2024

반가운 얼굴들

다시 강릉 9


친구가 왔다. 강릉역으로 마중을 나가며 마음은 들뜬다. 멀리 있어도 늘 옆에 있는 것 같은 그녀. 참 오랜 인연이다. 여고 3년 동안 우린 내내 짝꿍이었다. 그땐 키 순서 대로 일렬로 줄을 서서 1번부터 60번 몇 번까지. 우린 그 가운데 정도 35번 언저리에 앞 뒤로 섰었다. 우리들 앞쪽에는 20번대, 뒤에는 40번대. 지금 같으면 ‘차별’ 운운하며 어림도 없었을 이야기이지만…


늘 모여 앉아 같이 떠들고 웃고… ‘쇠똥구리가 굴러가는 것만 봐도 웃었던 시절’이니 뭐는 즐겁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 사이에서 난 늘 새침하고, 싸늘하고, 별로 말이 없었다. 돌이켜보면 그 당시의 내 모습은 참 우습기도 하고 슬프다. 세상의 모든 고민을 온통 다 뒤집어쓴 채 사는 것에 별 재미가 없었다. 지독한 사춘기를 지내며 세상을 시니컬하게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아는 게 없으면서도 속으로는 모든 세상을 다 아는 척했다. 잡다한 책들을 읽으며 독서를 통해 얻어지는 지식과 세상살이에 정신을 빼앗기며 지냈던 여고시절. 그 옆엔 묵묵히 바라보고 응원해 주었던 마음 좋은 친구가 있었다. 나의 팍팍함에도 짜증 한번 안 내고 옆에 있어 주었던 친구. 주말이면 우리 집에 오기도 하고 방학이면 1시간쯤 버스를 타고 가야 했던 그녀의 본가로 놀러 가기도 하며 친해졌다. 마음을 열고 더 가까워질 수 있었지만 차갑기만 했던 나는 마음을 열지 못한 채 3년을 지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세월이 지난 후까지 연락이 되고 늘 옆에 있는 것처럼 느끼는 것은 그녀의 따뜻한 마음이 언제나 옆 자리의 짝이 되어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졸업 후에도 늘 연락이 되었던 친구 중의 한 명이었고 그녀의 신혼집과 우리의 신혼집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어 왕래가 잦았다. 우리가 미국으로 유학생 가족이 되어 떠나고 핸드폰도 카톡도 없었던 시절에도 가끔씩 쓰는 긴 편지로 서로의 근황을 알았고, 카톡이 생기며 늘 옆에 있는 듯 지냈다. 올해는 우리들의 여고 졸업 50년인 해이다. 긴 편지의 안부와 짧은 엽서의 소식과 핸드폰과 카톡으로 이어지는 긴 세월 속에 그녀는 늘 함께 했다. 해마다 내가 강릉에 올 때면 먼 길 마다하지 않고 달려왔다. 예전엔 고속버스를 타고, 요즈음은 KTX를 타고. ‘왔어’ ‘여긴 강릉’ 하는 메시지를 보내면 그녀는 이내 반가운 목소리를 들려준다. 늘 ‘한번 갈게’라는 답을 하는 친구.


만나면 우린 옛 시절의 추억으로 수다 삼매경에 빠진다. 우리를 가르쳐 주셨던 선생님들의 이야기로 시작해 강릉과 서울에서 만나는 동창들의 근황. 자신들이 살고 있는 현주소. 미국에 살고 있는 나의 모습과는 조금 다르지만 이 나이쯤 되고 보니, 삶의 공통분모는 참 비슷하다. 자식 걱정, 손주 생각, 일상에 대한 고마움 등등. 이어지는 수다로 밤을 새운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돌아보면 참 열심히 살았고, 그 시간에 최선을 다했다. 그런 우리들의 모습을 보고 누구는 ‘꼰대’라 말을 하지만 난 인생의 선배들이 살아 냈던 진정성이라고 항변하고 싶다. 이야기 곳곳에 묻어 있는 삶의 아픔조차도 세월이 가며 아름다운 추억이 되고 그 추억을 먹고사는 우리가 된다.

지난 월요일도 예외는 아니었다. 1박 2일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고향의 소울푸드인, 감자전과 옹심이를 먹으며 이야기 삼매경이었다. 이 시간에 함께 했던 다른 친구 3명도 있었다. 올 때마다 환대를 받는다는 느낌. 그 고마운 마음에 따뜻한 저녁 한 끼 내 손으로 준비했다. 이번엔 6개월 만에 다시 나왔고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들은 <브런치>에 올렸던 글들과 카톡에 업데이트된 사진들을 보고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우리들의 수다엔 끝이 없다. 가벼운 운동이 꼭 필요한 우리들. 송정 솔밭 해변길을 걸으며 여고 시절 흰 칼라의 교복을 입은 시절로 돌아간다. 선생님들의 안부가 궁금하고, 친구들의 소식이 궁금하고, 모교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궁금했다.


근간의 소식을 제일 잘 알고 있는 친구가 업데이트를 해준다. ‘아~ 그래? 그랬구나!’의 소리가 이어지고 행복 바이러스는 솔향과 함께 어우러진다. 바다에는 잔 물결이 일고 백사장으로 밀려오는 추억은 흰 포말을 남기며 모래사장으로 밀려든다. 우리들의 웃음소리. 아직은 괜찮은 모습. 그 시절로 돌아가 해변에 긴 그림자 하나 만든다.

이어 마음은 감자 꽃이 활짝 피었다 지는 계절로 향한다. 우리들의 소울푸드인 햇감자를 포슬포슬하게 쪄서 식탁 위에 놓고 다시 마주 앉고 싶다. 그리움 가득한 이야기들은 감자 꽃처럼 하얗게 만개하고, 다음의 만남에서도 즐거운 수다는 계속 이어지겠지. 그때까지 우리들은 서로에게 따뜻한 시선으로, 포근한 손을 잡고, 일상에 감사하며… 행복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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