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강릉 8
경칩을 지난다. 아직 털모자를 쓰고 목도리를 두른 채 걷지만 바닷바람은 차다. 속보를 하면 등에선 땀이 조금 나지만 얼굴에 스치는 바람은 매섭다. 멀리 보이는 설산은 아직도 연초록과 숨바꼭질만 하고, 일기 예보도 강원도엔 눈이 내릴 수도 있다 한다.
외투의 깃을 올리며 잰걸음으로 찬기운을 떨쳐 버리려 애쓰며 귀에 꽂아 둔 이어폰을 톡 친다. 전자책(e-book)의 이어 듣기. 모노톤 여자의 음성이지만 발걸음을 맞추기엔 적당한 속도다. 전자책을 구매한 것은 3번째. 처음엔 몇 년 전 발간된 내 책이 전자책으로도 나왔다는 출판사의 연락을 받고, 정말? 하면서였고, 그다음은 내가 참 좋아하는 시인의 시집. 영구 소장이 가능할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이번엔 꽤 여러 권을 주문했다.
대형 서점의 앱을 깔고 구매를 했더니, 핸드폰 안의 나의 서재에 책이 바로 도착했다. 책들을 다운로드하고 매일 조금씩 읽고 있다. 그러다 발견한 기능이 <듣기>였다. 매일 걷는 시간 동안 이어폰을 꽂고 책을 듣는다. 어쩌면 눈으로 읽는 것만이 독서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건 이번이 처음이다.
독서는 종이책을 한 페이지 넘기며 그때마다 드는 느낌을 여백에 적거나, 마음에 와닿는 문장들을 밑줄을 치며 읽고, 감동적인 것은 형광 펜을 이용해 더 확실히 해 두어야 한다고 믿었던 아날로그 시대의 나의 독서 법.
걸으며 오디오 북을 듣다가 마음에 와닿는 구절이 있으면 이어폰을 톡 쳐서 멈추게 하고 전화기를 꺼내 형광 펜을 긋는다. 그리고 필요한 메모가 있으면 장갑을 벗고 독서 메모에 몇 자 써 둔다. 미국 집을 떠나 강릉에 도착하기까지 그 긴 시간 동안 이 기능을 정말 잘 이용했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있으니 집중이 되었고 책도 술술 읽혔다. 듣기만 하면 읽어지는 책. 몇 권의 고전을 전자책으로 구매했는데 그 방대한 양을 종이 책으로 읽으려 했다면 책의 두께가 주는 중압감 때문에 지레 겁을 먹었을지도 모른다.
3권 세트. 미국을 떠나며 읽기 시작했고 진작에 다 읽었지만, 요즈음은 다시 듣고 있다. 해변 솔 향 가득한 숲길에서 책을 들으며(읽으며) 걷고, 잿빛 바다 위로 밀려오는 높은 파도를 바라보며 책을 듣는다. 도요새들의 종종걸음 사이로, 물기 가득한 소나무 숲에서 만나는 고전. 머리에 쏙쏙 들어온다. 복잡하기만 한 인물들의 관계와 어려운 등장인물 이름들도 몇 번 들으니 금방 익숙하고, 내용도 이해가 잘 된다. 이야기와 이야기를 이으며 쓰인 문학적 표현. 발걸음을 멈추고, 형광 펜으로 쓱 긋고 또 걷는다. 혼자 걸을 때와 혼자 여행을 할 때는 이보다 더 좋은 친구가 없는 것 같다.
해안 길에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 그리 방해를 받을 일이 없긴 하지만 이어폰을 꽂고 다니며 독서의 집중도가 확실히 많이 올랐다. 절친과 같이 걸을 때는 음악을 작게 틀어 놓고 친구와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음악을 듣기도 한다. 걸으며 책도 읽고 음악도 듣고 풍경을 감상하기도 한다.
이제 책은 종이 책 이어야만 한다는 나의 선입견을 버린다. 들을 수 있는 책. 일석 삼조인 책. 가지고 다닐 무게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고 책을 놓을 공간을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시간 있을 때마다 꺼내서 읽거나, 들을 수 있는 편리함. 애용하려고 한다.
청력이 조금 나빠지거나 핸드폰을 오래 보고 있어 어깨가 굽거나 시력이 떨어질 수 있겠지만 ‘내 몸 사용 설명서’ 염두에 두고 과용만 하지 않으면 되지 않을까?
개구리가 깨어나고 설산(雪山)이 옷을 벗고 연초록과 노랑과 분홍의 이야기들을 알려 오면 난 귀에 다시 이어폰을 꽂고 다음 책을 읽으며 그 상큼함을 맞으러 길을 떠날 것이다. 심호흡을 하며. 잰걸음으로. 두꺼운 외투와 목도리를 벗고 가벼운 걸음을 옮기며 이어폰을 톡 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