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로 집에만 있다가 해변을 걷고 동네를 한 바퀴. 특별히 사야 할 것도 없는데 가게들을 기웃거린다. 그러다 문득 눈에 들어온 간판 하나. <<아이스크림>>. 미국에선 전혀 먹지 않는데 왜 강릉에 오면 아이스크림 생각이 나는 걸까? 혼자 웃는다. 그것도 ‘해태 브라보 콘’이다.
고2 때 친구집에서 가말고사 공부를하고 있었다. 그땐 야간 통행금지가 있었고, 가게가 문을 닫기 전 확보할 야식이 필요했다. 골목을 지나 가로등 아래에 있던 작은 가게. 들어가니 졸고 계시던 아저씨가 ‘뭐 줄까?’ 하는 표정이었다. ‘아이스크림’ 그때 누가 제안을 했는지 모르지만 내기를 하자고 했고 많이 먹으면 이기는 거였다. 우리 둘은 가게 앞 나무 의자에 앉아 먹기 시작했다. ‘아저씨 하나 더 주세요.’가 이어지고 난 13개를 먹었다. 주인아저씨는 우리 둘의 먹성에 놀랐는지 잠이 싹 달아난 표정이었다. 통금이 가까운 시간. 서둘러 친구집으로 돌아왔다. 내가 이겼고 친구가 돈을 냈다. 얼마였는지 기억은 없다.
아이스크림 13개를 한자리에서 먹었으니 배탈이 나지 않았느냐고, 그날 밤공부는 망쳤겠다고 누군가는 걱정이겠지만, 배탈도 나지 않았고 공부도 이어서 하다가 통금이 해제된 새벽에 집에 돌아와 등교했던 기억이 있다.
세월이 많이 흘러 몇 해 전 그 친구를 만났을 때, 아이스크림 먹기 내기를 기억하는지 물어보았다. 친구는 전혀 기억을 하지 못했지만 시험 기간이면 자주 친구집에 모여서 밤샘공부를 했던 건 기억했다. 골목 밖 가로등 아래 가게도 기억을 했고. 그 작은 언덕은 성당 바로 아래여서 친구집에서 공부를 끝내고 우리 집으로 돌아가며 가끔은 새벽 미사에 참석하기도 했었다.
정겨운 골목과 친구와의 따뜻한 우정과 내 유년의 추억들이 고스란히 배어 있던 골목길. 강릉에 올 때마다 그곳을 찾아간다. 유년의 추억들은 이미 사라진 골목 안에 고스란히 배어 있고 아직도 가슴 아린 첫사랑의 기억만 더 생각난다.
한 달 전쯤 집에 도착해 냉장고 문을 열어 보니 ‘싸만코’라는 아이스크림이 2개 있었다. 미국의 친한 친구 부부가 잠시 한국에 왔을 때 우리 집에서 쉬어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남겨 놓고 간 것이다. 미국 집을 떠나기 직전 그 부부와 저녁 식사를 같이 했고, ‘냉장고 안에 ‘싸만코도 있어요’, 했었다. ‘싸만코’가 아이스크림 이름인 걸 그때 처음 알았다. 해태 브라보 콘을 미쳐 사 오지 못했던 몇 주전, 싸만코를 하나 꺼내서 먹었다. 팥과 크림이 가득한, 붕어빵 모양의 부드러운 껍질. 해태 브라보 콘 보다 세련된 맛이라고 해야 하나? 더 부드럽고 더 달콤했다.
가게에 들어서자 아이스크림의 종류가 엄청 많다. 한 바퀴 돌며 기억되는 아이스크림들을 하나씩 담았다. 작은 장바구니가 꽉 찼다. 계산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발걸음을 재촉한다. 아이스크림이 녹을까, 아직도 곳곳에 눈이 쌓인 거리에서 속보를 했다. 서둘러 냉장고에 아이스크림을 넣으며 혼자 웃는다. 이 많은 양을 언제 다 먹지 싶다. 이걸 다 먹으면 열심히 운동해 체중 조절을 해 놓은 일이 도로아미타불이 될 텐데 말이다. 맛있게 먹으면 0칼로리라는 먹방 유튜브를 보며 스스로 위안을 삼지만 아이스크림 하나 먹자고 2만보를 걸어야 하는 아이러니. 확실한 의지박약이지만 지금 이 시간의 소소한 행복을 버릴 수는 없다.
해태 브라보 콘을 하나 뜯어 따뜻한 온 열 장판 위에 앉는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아이스크림이 목을 타고 시원하게 내려간다. 겉을 싸고 있는 콘은 바사삭 소리가 내며 부서진다. 해태 브라보 콘, 바닐라 맛. 이젠 강릉에 오면 꼭 먹어야 하는 것 리스트에 확실히 자리 잡았다.
아리고 쓰린 기억들도 달콤하고 부드러운 추억들도 아이스크림 하나에 녹으며 그렇게 가고 있다. 겨울이 저만치 가버리면 이한치한(以寒治寒)이었다는 변명을 늘어놓으며 동네 길을 걷고, 또다시 아이스크림 가게를 기웃거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