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잠이 깼다. 나이가 들며 잠 습관이 달라진 이유도 있지만 오늘 있을 ‘북 토크’에 신경이 쓰였나 보다. 다시 한번 책장을 넘기며 밑줄이 그어진 부분들을 읽는다. 핸드폰에 저장해 둔 책의 첫 장에 쓸 문구도 열어본다. 수평선에 닿은 여명의 분홍 하늘을 보며 누가 올까? 몇 명이나 올까? 말은 잘할 수 있을까?로 이어지는 생각들. 이 나이가 되어도 처음 하는 일은 상기되고 긴장된다. 더구나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거의 일대일로 해야 하는 이야기들을 어떻게 풀어가야 하나 싶다.
커피를 마시며 생각들을 정리한다. 있는 그대로. 쉽고 편하게 하자는 결론에 이른다. 모처럼 머리를 만지고 화장을 하고 원피스를 찾아 입으며 심호흡을 한다. 서점 <당신의 강릉>까지 동행해 줄 절친의 차에 올라 가을 색을 만나며 길을 간다. 노란 은행잎이, 붉은 단풍들이 더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시선의 차이 때문일까?
서점 안에는 빵 굽는 냄새와 짙은 커피 향이 잘 어우러지며 반긴다. 준비된 책상 위에는 꽃바구니들이 가득하다. 반갑고 고맙다. 시간이 되자 손님들은 하나 둘 계단 위로 올라왔다. 방문객 이름과 어떻게 알고 왔는지 물으며 책의 앞장에 생각나는 문구 하나를 쓰고 사인을 해서 건넨다. 말 그대로 <당신의 강릉>이 쏘는 이벤트. 무료로 책을 얻은 이들은 아래층에서 몇 권의 책을 더 구매하기도 하고, 앉아서 책을 읽기도 하고, 막 구운 빵과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기도 한다. 동두천에서 이 시간, 나를 만나기 위해 먼 길 마다하지 않고 찾아왔다는 글타래 님과 미국 생활을 오래 했다는 포남동의 어느 분. 솔향 강릉의 기자님. 성산골의 예비작가. 그리고 친구들. 어느 한 분도 놓칠 수 없었다. 짧은 대화 안에서도 우리는 통했고 마음은 깊은 곳에서부터 따뜻해졌다.
도서관과 대학 캠퍼스에서 포스터를 보고 왔다는 분들도 반가웠다. 며칠 전 절친과 발 품을 팔았는데 결과가 나쁘지 않았다. 예정되어 있던 오후 시간은 훌쩍 지나갔다. 서점 주인인 김민섭 작가의 소개로 북 토크를 시작했다. 어떤 질문이 주어질지 전혀 예상을 못했지만 책 안의 이야기들은 편안하게 풀어갔다. 강릉을 사랑하는 이유는 ‘강릉은 사랑’이다 라고 한마디로 표현. 이곳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는 고향 이상의 것이다. 오롯한 사랑이고, 오롯한 바다이고, 오롯한 평화이며, 오롯한 산이다. 강릉에서 책을 내는 이유도 그렇다. 여기서 할 수 있는 일들을 굳이 서울까지 가서 할 이유가 없다고 답했다. 지방의 소멸화를 걱정하는 요즈음, 소박한 욕심이겠지만 누구라도 고향을 지키고 살릴 수 있는 일을 하면 좋지 않을까.
그러다 ‘어떤 어른’이 되고 싶냐는 질문에는 적지 않게 당황했다. 난 과연 ‘어른’이란 단어에 어울리는 사람일까? 40여 년 미국 생활 중에 ‘열심히 산 것’ 말고는 아무것도 내 세울 것이 없고, 나이가 든 것 말고는 생각나는 게 없는 오늘의 내 모습. 젊은 시절의 나보다 훨씬 치열하게 사는 청년 작가 앞에서 어른인 척하는 것은 여간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답은 해야 했고, 열심히 살았고 잰걸음으로 살았지만 이젠 조금 느린 걸음을 걸어도 될 것 같다는 답을 했다. 솔직한 오늘의 내 모습. 천천히 걷고 있지만 젊은 청년들을 응원하며 발걸음을 맞추며 함께 가고 싶다.
마지막 질문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미식축구(Football). 내 목소리는 한 톤 올라갔다. 신나게 실타래 풀리듯 풀어가는 풋볼 이야기. 나 혼자 우리 팀이라고 부르는 덴버 ‘브롱코(Broncos)’를 목소리 높여 응원하는 이유는, 이기는 팀이 있으면 지는 팀도 있고 지난 10년간 거의 하위순위에 머무는 팀이라도 미국에서의 내 고향인 콜로라도 팀을 응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처럼 누구라도 박수를 쳐 주어야 희망을 안고 볼을 던질 수 있을 거라는 장황한 설명. 시간이 된다면 하루 종일도 할 수 있었을 풋볼 이야기. 그쯤에서 마치고 와인 한잔 하며 뒤풀이를 이어갔다. 이어지는 우리들의 이야기들.
누구나 ‘처음’이란 것은 늘 긴장되고 떨린다. 그래도 새로운 또 하나를 해냈다는 마음만 간직하기로 한다. 가을에 와 있는 나의 인생. 은자작나무들이 황금빛으로 물들어 온몸을 찰랑거리는 록키 산맥의 끝자락에서, 단풍이 진초록들 사이에서 붉게 물든 대관령 옛길에서 느린 걸음을 옮긴다. 먼 시선 속에는 잔잔한 물결의 바다도 함께한다. 더 곱고 아름다운 색깔로 다가올 내 인생의 가을이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