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의 전화를 받고 조금 망설였다. 고구마를 캐러 함께 가자 한다. 농사는 안 해 봤지만 고구마 덩굴을 잘라내고 줄기처럼 달려 있는 고구마를 캐내는 것. 쪼그리고 해야 할 일이고, 호미로 땅을 파야 하고, 고구마가 찍히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 조심해서 하면 될 일이지만 한여름, 그것도 한낮의 태양은 뜨겁다는 것이었다.
함께 가보자는 친구의 권유로, 소풍처럼 재미 삼아 가보자고 마음먹었다. 양양 근교의 밭. 농기구를 보관하기도 하고 잠시 쉴 수도 있는 농막까지 갖춘 꽤 큰 밭이었다. 밭에는 각종 야채들이 골고루 자라고 있었다. 무성 한 풀숲 밭사이 흙 길.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흙냄새도, 풀냄새도, 마냥 푸른 여름 끝자락의 텃밭. 여름 내내 농부에게 소출을 내주었고 길손들까지 아낌없이 나누어 주는 땅. 갑자기 나도 농사가 짓고 싶다는 욕심.
친구가 내준 장화로 바꾸어 신고 얼굴 전체와 목을 가릴 큰 차양의 모자를 쓰고 장갑을 끼고 호미를 들었다. 밭주인이 우선 고구마 덩굴을 낫으로 베어 치우며 캐는 요령의 시범을 보여주었다. 일단 한 골을 캐라 한다. 호미로 깊이 파, 고구마가 망가지지 않게 조심해야 하고, 뿌리가 줄기처럼 붙어 있어 줄줄이 나오면 모래와 흙을 털며 하나씩 분리해야 하고. 놀이처럼 시작했던 것은 곧 노동이 되었다. 땀은 비 오듯 흘렀다. 목장갑으로 쓱 문질러 닦으면 얼굴엔 흙이 가득했다. 욕심을 접었다. 내 능력으로 농사는 안 되겠네, 하며. 친구는 얼려간 물을 건네며 마시라고 한다. 그렇게 시원한 물이 있었던가 싶다.
쪼그리고 앉아하는 일은 무릎도, 등도, 허리도 아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미 질 몇 번에 커다란 고구마들이 줄줄이 나오는 것이 신기했다. 밭고랑에는 고구마가 수북이 쌓였다. 땅속에서 막 캔 고구마는 습기가 많아 펼쳐 놓아 습기를 제거해야 보관하기 좋다.
고구마 옆으로는 각종 야채들이 풍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고추, 가지, 호박. 파. 상추. 열무. 배추까지. 없는 게 없는 밭. 대추와 무화과나무가 밭의 가장자리를 지키고 모든 것이 익어가는 가을을 기다리고 섰다. 약간 갈색을 띠기 시작한 대추 하나를 따서 입에 넣었다. 씹히는 상큼함 속으로 달콤함도 같이 베어 난다.
생각보다 빠른 시간에 많은 양을 수확했다. 즐겁다. 허리를 펴며 고구마 순을 꺾어 다듬는다. 고구마순 김치가 맛이 색다르다는 친구의 말에 열심히 다듬어 친구의 가방을 가득 채웠다.
고구마와 각종 야채들을 가득 싣고 돌아오는 길. 처음 해 보는 것들은 늘 흥미롭고 재미있지만 수확의 즐거움은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수확의 즐거움이라는 의미를 애써 부여하지 않아도 마음이 가득 찬 듯한 느낌. 밭을 갈고 이랑을 만들고 모종을 싶으며 기대했을 수확의 시간. 노동과 기다림의 시간에 비해 수확이 적어도 기다림은 마음을 설레게 만든다. 작은 것들이 자라 그 풍성함으로 이웃과 나누는 마음.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농작물은 자란다고 하지 않는가?
흙은 변하지 않는다. 농사꾼이 다 된 이의 나누는 마음과 가꾸는 정성을 배우며 함께 했고 풍요로움을 배우며 다음 계절로 향했다. 지금쯤 밭 가장자리의 대추도 붉게 농익고 짙은 가을 이야기를 뒤로 하고 찬바람 이는 늦가을로 가고 있겠지만,
성큼 다가온 추운 계절, 오래 두었던 고구마를 삶으며 나눔의 마음 넉넉했던 친구에게 감사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