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당신이 살았으면 좋겠다
연고자를 찾습니다
성별 : 여자
나이 : 60세 정도
거주지 : 조지아 주 애틀란타 시 1234번지
특징 : 발견 당시 붉은 스웨터에 검은 바지를 입고 있었으며 한국식 꽃무늬 버선을 신고 있었음. 집배원이 열흘 이상의 우편물이 쌓이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해 경찰에 신고하여 발견됨.
미주 중앙일보에 기사 하나가 실렸다. 한인 독거노인이 자택에서 사망했는데 연고자를 찾지 못해 장례를 치르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열흘이나 지나서야 발견된 할머니의 이야기에 말 설고 물 설은 이국 땅에서 혼자 쓸쓸히 죽음을 맞이했을 한 여인의 운명에 가슴이 짠했다. 신문을 덮고 나자 나를 유일하게 "섹시하다"라고 표현했던 한 한국 할머니가 떠올랐다.
할머니는 암 병동에 입원해 있었다. 처음부터 내가 담당한 환자는 아니었는데 암 병동 11층의 케이스 매니저가 영어가 불편한 한국 환자라며 내게 부탁한 환자였다. 내가 '한국인 환자'라는 수식어가 붙거나 '영어가 불편한 한국인'이라면 늘 달려가서 돕는다는 걸 다른 간호사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시간이 되는 데로 올라 가 보기로 하고, 미리 환자의 병력을 알기 위해 방문해야 할 환자의 이름과 방 번호를 물었다. Ann Johnson. 이름만으로는 한국인임을 전혀 알 수 없었다. 환자가 미국으로 건너온 것은 1960년이라고 했다. 이후 한 번도 한국을 방문한 적이 없었다고 했다. 병명은 자궁 경부 암과 폐암. 상당히 진행된 상태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오전 라운딩이 끝나고 시간적 여유가 조금 생겼다. 환자를 찾아가 병실 문을 노크하며 한국말로 인사를 건넸다.
“할머니,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사람이고요, 케이스 매니저입니다. 간호사이기도 하지요. 할머니를 도와 드리려고 왔습니다."
할머니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하셨는지 어눌하고 악센트가 심한 영어로 말씀을 이어가려 노력하셨다.
"한국말로 편안하게 대답하셔도 돼요. 저 한국 사람이에요."
내가 다시 한번 말을 건네자 그제야 한국말을 쓰시기 시작했다. 할머니의 병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암으로 인한 통증은 견딜 만했지만 숨이 차오르고 자궁경부에서 흘러나오는 악취 나는 분비물을 처리하는 것은 무척 고통스러웠다.
“옛날에 한국에서 쓰던 ‘개짐’ 같은 것이 있었으면 좋겠어.”
한국말인 것은 확실한데, 개짐이 무엇인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애기 엄만 아직 젊으니까 그런 거 모르는가? 미국에서 쓰는 패드 같은 것 말이야.”
그러고 보니 옛날 새 신부가 시집가는 날 다홍치마 입고 가마를 타는 풍습이 생긴 연유가 어렴풋이 생각났다. 생리대와 탐폰. 그런 것들을 잊고 살았는데.
“여기도 그런 것 있지요. 아기용품 파는 곳에 가면 면으로 만든 기저귀가 있을 텐데 필요하면 사다 드릴까요? 근데 신생아용이라 사이즈가 맞을지는 모르겠네요.”
그래도 한 몇 개 사와 보라며 지갑을 연다. 일단 사 가지고 오면 돈을 달라고 손을 젓자, 꺼내던 지갑의 앞 쪽에서 사진 한 장을 보여주신다. 흑백 사진임에도 불구하고 화려해 보이는 원피스를 입고 머리엔 커다란 나비 리본을 맨 앳된 여자와 한 백인 병사가 사진 속에 있었다. 손지갑을 바꾸거나 필요할 때마다 빼내 보았을 사진은 귀퉁이가 허옇게 낡았다.
“두 분 옛날 사진인가 보네요?”
“그래.”
그때 마침 회진을 돌던 암 전문의가 들어왔다. 환자와 대화에 어려움이 있었는데 내가 옆에 있으니 잘 되었다며, 할머니에게 여러 가지 치료 방법들을 알려줬다. 하지만 할머니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모든 치료를 거부했다. 그리고 편안히 갈 수 있는 호스피스를 택했다.
"할머니의 선택을 전적으로 존중하지만, 아직 시간이 있으니 내일까지 더 생각해보시죠."
암 전문의는 급하게 결정을 하지는 말라며 내일까지 다시 생각을 해보라는 말미를 주고 나갔다. 이럴 땐 내가 옆에서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것보다는 환자 혼자 생각할 시간을 주는 것이 좋다. 그래야만 누구의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본인의 생각을 정리하고 스스로 판단하여 자신에게 최선의 방법을 선택할 수 있다.
간호사도, 의사도, 케이스 매니저도, 호스피스 간호사도 각각 개인의 의견이 다르고 이야기를 오래 하다 보면 개인적인 의견에 따라 환자에게 영향을 주게 된다. 우리는 우리 병원의 증상 완화 간호사를 '죽음의 전령사'라고 부른다. 삶의 질을 강조하며 질이 없는 생명 연장을 반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의사들은 그녀가 자신의 환자를 보는 것을 절대 반대한다.
다음날, 할머니 방에서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미군 병사였던 남편을 따라 미국에 왔다고 했다. 결혼 후 처음 남편을 따라 미국에 왔었을 때 오클라호마 어딘가의 작은 마을의 남편 집이라는 곳을 갔었다고 한다. 하지만 군인이라는 직업 때문에 부대 이동에 맞춰 5-6년씩 이사를 다녔고, 지금 이곳에서 제대해 지금까지 쭉 이곳에서 산다고 했다. 자식을 낳으려고 노력했으나 임신이 되지 않았고, 한국 가족과는 인연을 끊은 지 오래라고 했다.
할아버지는 현재 치매가 심하여 동네 요양원에 있었다. 할머니는 매일 가던 면회를 벌써 며칠째 걸렀으니 잘 지내고 있는지 걱정하였다. 이미 11층의 케이스 매니저가 요양 병원에 연락하여 할아버지의 유일한 연고자가 우리 병원에 입원한 사실을 알리고 난 후였지만 할머니는 무척 상심했다.
"애기 엄마가 보기에도 살 가망이 없는 그론 중한 병인가"
할머니는 어느새 나를 '애기 엄마'라 부르고 계셨다. 할머니의 질문은 늘 듣는 질문이지만 늘 답이 궁한 것 또한 이런 질문이다. 가끔은 애매하게 끝을 흐리고 또 가끔은 확실하게 답을 한다. 어느 답이 되었든 쉽지는 않지만 상황에 따라 답을 한다.
"그런 것 같아요. 상당히 진행된 암이거든요. 한국에 가족 있으시면 연락하셔서 들어오게 하시고 남편 쪽 친척들에게도 연락을 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그래도 답은 역시 마찬 가지였다. 두 부부에게는 아무도 없단다. 친척도 친구도. 오랫동안 둘이 서로 의지하며 살았고, 살만큼 살았는데, 편안하게 가면 되지 뭘 그리 애걸복걸하겠느냐고 말끝을 흐렸다.
퇴근 전, 다시 환자의 방을 찾았다.
“나는 꽃을 참 좋아했지. 꽃병에 꼽혀 있는 것 말고 마당가에 심어진 것들 말이야. 아침 이른 햇살에 이슬을 머금고 피어나는 나팔꽃을 보면 말이야 자신이 생겼지. 그렇게 활짝 필 것 같은 자신 말이야. 오, 그건 그렇고 애기 엄마 지금 참 섹시하네. 검은 스타킹도 그렇고, 입술 색도 그렇고, 남편이 좋아하겠어, 호호호."
할머니의 말씀에 당황했다. 내 차림새를 보고 지금까지 누구도 섹시하다는 표현을 한 적이 없다. 단정하고, 깨끗한 옷을 입고 다니는 편이며 목이 깊이 파였거나, 소매가 없거나, 꽉 끼는 바지 같은 것은 절대 입지 않는다. 그런 날 보고, 왜 그런 표현을 하였을까. 어쩌면 할머니가 할 수 있는 일종의 찬사 일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당황했지만 나는 생글거리며 아주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생각해보셨나요? 할아버지가 입원 중이신 요양원에 함께 보내 드릴까요? 그곳에서도 임종 간호를 동시에 받을 수 있거든요. 한국 연락처는요?"
"그래. 아무래도 영감 있는 데가 낫겠어, 혼자 집으로 들어가면 더 쓸쓸하겠지. 입원해 있느라 비워 둔 집이니 다 그럴 거야. 한국 연락처는 정말 없어. 연락 끊고 산지가 벌써 언젠데….”
"그래도 한 번쯤은 연락을 해 보아야 하지 않겠어요. 어쩌면 다시는 못 만날 가족들인데요."
"가족? 그런 거 잊은 지 오래야. 애기 엄만 화목해서 모르는 모양인데. 집이 싫어 뛰쳐나온 나 같은 사람에게 가족들은 그냥 힘겨운 존재일 뿐이야. 근데 말이지, 혹시 나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혹 애기 엄마가 와 줄 수 있어?"
아무렇지도 않게 엮어 가는 이야기 속에서 할머니의 외로운 얼굴을 읽었다면 나의 과장일까. 검버섯이 핀 주름진 손등과 문신 자국이 선명한 검은 눈썹 사이로 번지는 쓸쓸함. 한국말로 커다랗게 이름과 연락처 등을 적어 드리며, 그렇게 하시라고 하자 언뜻 눈물을 글썽이며 내 손을 꽉 잡는다.
"고마워 애기 엄마, 혼자인 것은 참 무서워."
다음 날, 할머니는 요양원으로 퇴원하여 임종 간호도 함께 받기로 했다. 그리고 난 할머니를 잊어버렸다. 일상의 바쁨도 핑곗거리였지만 적어 드렸던 쪽지 하나로 임무를 다했다고 생각했다. 무슨 일이 있으면 당연히 연락이 올 것이라는 나 나름의 믿음도 있었다.
중앙일보 기사를 보며 할머니로부터 한 번도 연락을 받은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로 할머니가 가셨던 요양원에 전화를 걸었다. 개인정보라 알려주기 힘들다고 했지만, 우리 병원에서 있었던 환자와의 관계를 장황하게 설명한 후에야 조심스러운 답을 들을 수 있었다.
할머니는 역시 내가 적어드린 쪽지를 잃어버렸던 모양이었다. 돌아가신 후에도 아무런 연고가 없어 카운티에서 사후 처리를 했단다. 그린베레 장의사에서 간단한 장례를 치렀고 화장하여 뿌렸단다. 살고 있던 집도 카운티에서 처리를 하여 할아버지 병원비로 적립해 놓았다고 했다. 치매의 정도가 심해진 할아버지는 아내의 죽음을 전혀 모른 채 요양원에 누워 계신다. 할머니는 한국인이었는데 영사관 같은데 연락을 해보아 연고자를 찾을 생각을 안 해보았냐고 묻자, 요양원에 가지고 있던 기록에는 미국인이라고 되어 있었다고 했다.
좀 더 일찍 연락을 했었어야 하는데. 후회를 했어도 시간은 이미 저만큼 지난 후였다. 조그만 더 신경을 썼더라면 그렇게 혼자 임종을 맞게 하지는 않았을 텐데. 가슴으로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낯선 땅에서 남편 하나만 바라보고 평생 살았을 여인. 두고 온 고향을 떠난 후로는 한 번도 돌아 가보지 못했던 여인. 얼마나 가슴이 시렸을까. 하늘나라에서는 두고 온 가족들을 만나면 서로 알아볼 수는 있을까. 알아본다면 따스한 손을 마주 잡고 회포를 풀며, 지난 시간은 모두 잊어버리고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쩌면 할머니는 개나리와 철쭉, 산유화 흐르러지게 핀 한국의 봄날이 보고 싶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