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12월에, 거리에서 다시 만난 그녀는

by 전지은



오랜만에 콜로라도 스프링스 시내에 나왔다. 가끔 주말이면 남편하고 근사한 저녁을 먹거나 친구들과 어울려 점심을 먹기도 했던 곳. 작지만 깨끗하고 예뻐서 걸어 다니기 좋은 곳이다.


시내에 나온 이유는 선물을 사기 위해서다. 한국에 갈 때마 다 꼭 선물할 일이 생기는데, 이번엔 콜로라도에서 생산된 특산물을 사고 싶었다. 가게들을 기웃거리며 이곳의 대표 여행지인 로키산맥, ‘신들의 정원’이 그려진 티셔츠 등을 뒤적거렸다.


시내는 크리스마스 장식과 멀리 파이크스피크 산정의 흰눈까지, 한 폭의 그림과 같은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조금 걸은 탓에 약간 더운 느낌이 들어, 100년 전통의 수제 아이스크림 가게를 찾았다. 가게 입구부터 보도블록 저쪽까지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다. 관광객일까, 아니면 나처럼 답답함에 지쳐 모처럼 포근한 겨울 날씨에 쇼핑을 나온 사람들일까 궁금해하며 길게 늘어선 사람들의 표정을 살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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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을 서 있는 사람들 사이로 3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남루 한 차림의 여자가 동냥한다. 지나치기에는 너무 가까운 거리여서 지갑에서 1달러 한 장을 건네었다. 그런데 얼굴을 보니 아는 사람이었다.


“혹시, 캐시 아닌가요?”


내가 묻자 그녀가 내 얼굴을 보며 말했다.


“저를 아시나요?”


“펜로즈 병원의 중환자실 간호사였어요. 한 15년 전쯤이죠?”


내 대답을 들은 그녀는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빼앗듯이 지폐를 잡아채고는 달아났다.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옆에 길게 서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 쏟아졌다. 당혹스러운 나머지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도, 쇼핑을 계속할 수도 없어 서 둘러 차로 돌아왔다. 차를 세우고 미리 결제했던 주차 미터에는 아직 한 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돌아오는 길, 그날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캘리포니아 주에서 콜로라도주로 이사와서 펜로즈 병원의 중환자실에서 일을 막 시작했던 어느 겨울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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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총상을 입은 환자가 응급실과 수술실을 거쳐 중환자실로 왔다. 약혼녀와 함께 시내를 걷고 있었던 그는 어디선가 날아온 한 방의 총에 맞았다. 총상 환자의 경우 환부 입구는 작지만, 총알이 빠져나간 환부의 출구는 입구보다 훨씬 크다. 총알의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다섯 배 이상이다. 더구나 복부 관통상인 경우에는 총알이 복부 내장 전체를 휘젓고 나갔다고 보면 된다. 환자의 복부는 부종이 심해 봉합할 수 없는 상태였고, 거즈 패 킹 위에 투명 드레싱을 덮은 채로 왔다.


인공호흡기를 걸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출혈량이 너무 많아 생명이 위태로운 중환자였다. 환자의 상태는 매우 불안정했고, 투명 드레싱 밑으로 고이는 출혈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15분마다 혈소판과 혈장, 혈구수를 측정했는데 매 순간 떨어졌다. 계속 수혈을 했지만, 출혈에 비해 수혈이 훨씬 더디었다. 다시 수술실로 돌 아갔고 복부대동맥의 출혈 부위를 다시 연결하는 수술을 한다고 전갈을 받았다.


정신없이 어질러진 병실을 정리하고 기구들을 청소하고 소독하는데 갑자기 원내 방송이 들렸다.


“코드레드, 3번 수술실.”


혈액이 부족하다는 응급 신호다. 병원에 이 방송이 나오면 병원 직원들이나 보호자 혹은 방문객들이 급하게 헌혈을 하기도 한다. 코드레드는 조금 전 심한 출혈이 멎지 않아 수술실로 돌아간 그 환자였다.


대기실에 있던 약혼녀를 급하게 찾아서 상황을 설명했다. 그들은 이곳을 여행 중이었고, 여긴 아무 연고가 없다고 했다. 나는 그녀에게 가족들을 빨리 오게 하라고 일러둔 뒤, 간호사실로 들어섰다. 수간호사가 내게 혈액형을 물었다.


“AB형이야. 무슨 일이야?”


“혹시 지금 바로 헌혈해 줄 수 있을까? 병원 내 혈액이 동이 났어. 이웃 병원과 시내 혈액은행에서 가져오려면 적어도 한 시 간 이상 걸려. 그동안 시간을 벌어야 해.”


“알았어. 바로 갈게.”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흔쾌히 우리 병원 안의 혈액은행으로 달려갔다. 1파운드만 하면 된다는 것을 이왕 하는 것, 2파운드도 괜찮다며 팔을 걷어 올리고 침상에 누웠다. 어차피 내 환자를 돕는 일이니까. 환자의 약혼녀와 또 다른 간호사 한 명도 헌혈했다. 그러는 사이에 이웃 병원에서 혈액이 도착했고 환자의 수술은 무사히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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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시간의 긴 수술 후 환자가 중환자실로 돌아온 것은 새벽 4시였다. 출혈이 멈추지는 않았지만 수술실로 돌아갈 때보다는 안정적이긴 했다. 하지만 밤 근무자와 아침 근무자의 인계 시간인 아침 7시경 환자의 상태는 급격히 나빠져 더는 손쓸 수가 없었다.


가족은 아직 오는 중이었고 약혼자는 몸을 가눌 수가 없을 만큼 힘들어하는데 경찰은 사건 경위를 조사한다며 여러 가지 질문을 했다. 둘이 여행을 왔고, 낯선 이곳에서 그가 총에 맞을 일은 없었다는 것이다. 뉴욕에 살았던 둘은 연휴를 즐기러 이 작은 도시, 로키산맥 끝자락을 찾아왔고, 설산을 즐기고 포근한 겨울 오후에 여느 연인들처럼 손잡고 시내를 걷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곳은 우범지역도 아니고 심각한 인종 갈등도 없었다. 총에 맞은 것은 확실한데 총알이 어디서 날아왔는지 오리무중이었다. 환부의 상태로 봐서는 꽤 가까운 곳에서 쏜 게 분명한데 목격자도 없었다.


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약혼녀, 캐시를 사회사업가에게 인계했다. 그녀가 며칠 머물러야 할 숙소가 필요했고, 가족들이 도착하면 필요한 일이 있을 것이었다. 병원 내의 사회사업가는 타지 역에서 온 환자 보호자들에게 병원 내에 있는 임시 숙소나 병원 근처의 숙소를 연결해주는 일을 한다.


그날 밤 퇴근을 하는데 약간 어지러웠다. 무리하게 헌혈했던 탓인 것 같았다. 집에 돌아와 마침 푹 고아진 소고깃국 한 대접이 있어 그걸 먹고 잠을 청했다.


간호사 생활을 하면서 총기 사건이 흔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 들 또한 지나치는 한 환자였기에 내 기억에서 자연스럽게 잊혀 갔다. 미국에서 심심치 않게 들리는 총기사고는 총기 규제가 너무 형식에 그쳐서 그런 게 아닌가 싶다. 콜로라도주는 바지 뒷주머니나 손목 등 보이는 곳에 총을 차고 있으면 자기 방어용으로 규정해서 아무런 제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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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15년이 지나 캐시를 다운타운에서 만났고, 그녀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는 게 신기했다. 헌혈하는 침상에 누워 서 들은 그들의 사랑 이야기가 워낙에 애잔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런데 그녀가 왜 지금, 아직 이 동네에서 걸인 행색을 하고 있을까? 오늘 만났던 시간에 맞춰 내일 다시 시내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왜, 이곳에서 이러고 있느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혼자서 다시 가려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친구를 불러 상황을 설명하고 함께 가자고 도움을 청했다. 친구와 나는 시내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그녀를 찾았지만 끝내 만나지 못했다.


목숨보다 사랑했던 첫사랑이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가 버린 후, 그 죽음의 이유를 찾기 위해 그녀는 이곳을 떠돌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의 흔적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그와 함께했던 마 지막 시간인 이곳에서 약혼자를 쏜 범인을 찾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아직도 그 사랑을 놓지 못해 이 동네에서 헤매는 것일까.


시내를 얼마나 걸었을까. 동행했던 친구가 다리도 아프니 그만 돌아가자고 한다.


“그래야겠네. 사실 그녀를 다시 만난다 해도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없는데.”


단지 그녀가 여길 떠도는 이유가 궁금했다. 그 또한 그녀가 사랑했던 사람을 가슴에 안고 사는 방법인지도 모른다. 함께했던 시간들을 추억하며 사랑했던 시간들을 그리워하며 사는 일. 절절했던 사연이 있었을 수도 있고, 그 시간에 여전히 갇혀 있을 수도 있다.


내가 그녀를 간절히 찾았던 건 어쩌면 그 옛날 너무도 아팠던 내 첫사랑에 대한 기억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녀를 다시 만나 면 이렇게 떠도는 이유가 무엇인지 묻고 싶었다. 자학 같아 보이는 그녀의 행위가 어쩌면 옛사랑에 대한 보상 심리 때문이라면, 이제 그만해도 되지 않냐고 말해 주고 싶었다.


콜로라도를 상징하는 선물은 결국 사지 못했다. 단것을 좋아하는 친구와 수제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먹으며 차에 올랐다. 입 안에서 달콤하게 살살 녹는 아이스크림처럼 그녀의 사연도 이제 는 녹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느새 시내에도 붉은색 노을이 내린다. 저 멀리 붉은 하늘로 그 옛날 내 아팠던 첫사랑도 떠나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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