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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하는 길 위의 시간들 18

셀축(Sulcuk)과 쉬린제 마을(Sirince Village)을 향하여

by 전지은


새벽 5시. 어둠이 채 가시지도 않았다. 여행 인원이 많아 버스 2대가 동시에 출발한단다. 앞차인 우리 차는 어제 만났던 재우 가이드, 뒤차는 전날 이스탄불 클래식 투어에서 만났던 정미 가이드. 아는 얼굴들이 반갑다. 40인승 대형 버스에 21명 여행객과 가이드, 현지 가이드, 기사님까지 24명이 탔으니 버스 안은 넉넉하고 쾌적하다. 버스의 앞자리에는 우리가 5박 6일 동안 여행 할 곳의 지도가 붙어있고 화살표로 진행 방향을 표시해 놓았다. 이렇게 한 바퀴 도는 거구나 싶다. 튀르키예는 대한민국의 8배의 크기라고 하니 동부 깊숙이 들어가지 않는다면 이 정도는 걸려야 될 것 같기는 하다.


우리 버스에는 8팀이 탑승했다. 각 팀의 이름을 정해 보라는 가이드 말에 따라, 물론 덴베팀이라 지었다. 오스만 제국의 매력에 빠져 엄마와 함께 왔다는 리건 팀. 같은 학과 동기 생인 예쁘고 젊은 여학생 둘. 부부. 군대 가기 전 엄마와 함께 왔다는 팀. 아들 둘을 데리고 온 아빠. 신혼부부. 남자친구와 함께 등. 모두들 의미 있고 보기 좋다. 거의 한 주를 함께 할 우리들. 셀축으로 향한다. 가는 길이 멀다는 안내의 말.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창밖의 풍경에 흔들리다 보면 목적지에 가 있겠지 싶다. 버스에서 나누어 주는 케밥과 주스. 전날 먹었던 것에 비해서는 턱없이 작고 맛도 그랬지만, 이 정도면 아침 한 끼로는 충분한 것 같다. 이스탄불 시내를 벗어나며 해가 떠 오르고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여느 도시의 교외와 별 차이가 없다. 깨끗하게 정비된 고속도로. 막힘이 없이 시원하게 달린다. 산업 현장들도 보이고 푸른 채소 밭도 이어진다. 참 크고 정돈이 잘된 나라라는 느낌.


두어 시간 달렸을까, 휴게소에 도착했다. 별다방이 있다. 웬 일? 튀르키예에 왔으니 터키 커피를 마셔보라는 말에, 커피와 바클라바를 주문한다. 남편 커피를 한 모금 얻어 마셨는데 엄청 진하다. 이걸 한잔 마시면 밤에 못 잘 것 같아서 나는 가벼운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버스는 다시 출발, 쉬린제에 도착했다. 셀축에서 한 8km 떨어진 이웃 산동네 마을. 오르락내리락하는 언덕과 울퉁불퉁 돌이 깔린 골목들. 자유 점심이라, 야외 풍경이 근사한 곳을 찾아 들어갔다. 입구에서는 아이스크림을 팔고 예쁜 기념품 가게도 덤으로 있다. 쉬린제 아르테미스 식당(Sirince Artemis Restaurant). 이름도 유적지를 빌려왔다. 가지요리와 양고기 케밥, 튀르키예식 부침개 등과 동네맥주, 에페스(Efes)를 한잔씩 주문해 편하게 식사를 한다. 식사가 끝나고 동네 한 바퀴를 돌며 튀르키예의 시골 모습을 만난다. 예쁜 선물 가게들과 수공업 전시장도 있고 직물과 도자기를 굽는 공방 모양의 가게도 있다.

다시 버스에 오르고 다음 행선지로 향한다. ‘마리아의 집(House of Virgin Mary)’. 1878년 독일의 한 수녀가 꿈에서 계시를 받은 장소. 수녀의 환시를 들은 프랑스 신부가 탐사를 했고 탐사로 찾은 곳이 수녀의 꿈과 일치했단다. 성모 마리아가 승천 직전에 머물렀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작은 교회 안은 촬영이 금지 돼 있고 한 번에 8명만 들어갈 수 있어 긴 줄을 서서 입장하고 잠시 기도를 드리고 나온다. 작은 기도실 바깥쪽에는 마리아의 집 안내문이 한국어로도 적혀 있어 얼마나 많은 한국인들이 성지 순례 때 방문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아직 바티칸에서 승인을 받은 성지는 아니지만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찾아오는 곳이란다. 조금 내려오면 소원을 적어 걸 수 있는 벽이 있다. 미리 준비해 갔던 소원을 비는 쪽지 꼭 꼭 숨겨 떨어지지 않게 묶어둔다. 옆에는 성수를 받을 수 있는 곳도 있다. 정성스레 성수를 받아 가방에 넣는다. 미쳐 성수통을 준비하지 못한 젬마에게 나누어 준다는 약속을 하며 나오는 길. 안내문에는 매일 미사가 봉헌된단다. 미사 시간에 왔더라면 참 좋았을 것을… 아쉽다. 세례터는 열쇠 모양으로 움푹 파여 있다. 하늘로 가는 열쇠모양을 닮은 걸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버스에 오른다.


다음은 에페스(Ephesus). 고대 도시로 들어가는 길은 반들반들 대리석이다. 얼마나 많은 방문객들이 발자국을 남겼을까. 옆으로 남아 있는 유적들.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갖고 있다. 목욕탕. 냉, 온탕이 구분돼 있고 사우나도 있었단다. 와우~ 탄성 말고 할 수 있는 반응이 아무것도 없는 내 표현의 한계가 참 아쉽다. 이어 오데온(Odeon). 14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소극장. 원래는 지붕이 있었단다. 작은 공연과 시낭송회 등도 했단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유적들. 여기는 시청사였고, 저기는 공의회 회의실, 대성당의 잔해도 남아 있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설명을 이어가는 재우 가이드. 다 기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복습을 하고 있는 지금도, 그가 보내 주었던 자료와 내 기억을 잡아 두기 위해 했던 짧은 메모와 좋은 기록이 될 것 같아 찍어 놓았던 사진들을 바탕으로 겨우 이어가고 있다.

고대도시 에페소는 약 3000년의 역사를 지닌 도시. 이탈리아의 폼페이 보다도 컸다고 하니 당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도시였던 것만은 확실하다. 세월 속에 남겨진 유물들을 통해 역사를 전해 주는 고대도시의 이야기. 그 앞에서 조금은 숙연해지기까지 한다. 만나는 것들마다 감탄하며 걷고 또 걷는다.


도착한 곳은 셀수스 도서관(Celsus Library). 2세기경 건립된 이중 벽 구조의 대형도서관으로, 로마시대의 학문과 문화를 상징하는 곳이다. 이런 멋있는 도서관에서 학문을 갈고닦았다면 나도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을까,라는 엉뚱한 생각 하나가 휙 지나간다. 혼자 웃으며 도서관 입구에서 팔 벌려 로마사람 흉내를 내며 인증샷 하나.


이어 원형대극장. 25,000여 석의 극장은 원형이 잘 보존돼 있다. 로마나 아테네에서 보았던 것도 더 큰 것 같고 상태도 더 좋아 보였다.


다음은 아르테미스 신전터(Artemis Taponagi).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의 파르테논 신전보다 훨씬 큰 것으로 추정되어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란다. 그 크고 높은기둥을 고대 시대에 어떤 방법으로 건축한 걸까. 현대인들이 모르는 고대인들의 방법이 궁금하다. 3Km에 걸쳐 세워져 있다는 남아있는 기둥들의 위용 바라본다. 유적지 전체는 2015년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종일 걸으며, 들어도 들어도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유적지들과 설명. 뜨거운 태양 아래, 고대인들의 숨결과 현대인들이 배우는 인문학 부려두고, 숙소로 향한다.


파묵칼레 온천 호텔에 도착. 방 배정을 받고 짐을 풀고 호텔식 석식을 마치자 야외의 온천장을 밤 11시까지 이용할 수 있단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면 하루의 피로가 확 달아 날 것 같아, 서둘러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나온다. 그러나 물의 온도는 생각처럼 뜨겁지 않다. 깊이를 전혀 가늠할 수 없는 진흙탕 물이다. 그래도 온천이라니 몸을 담근다. 밤공기는 차고, 물은 미지근하고, 실외 수영장 옆에서는 튀르키예 음악에 맞춰 히잡을 쓴 여인들이 육중한 몸을 흔든다. 방으로 들어가 쉬고 싶어도 음악소리에 11시까지는 잠을 잘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다 갑자기 생음악, ‘아리랑’이 나온다. 튀르키예 여인이 부르는 아리랑. 얼마나 많은 한국 여행객들이 왔으면, 이럴까 싶다. 애국가가 안 나온 게 다행이다. 차리리 좀 흥겨운 음악이었더라면… 총체적 난관.


그 사이, 남편과 후배님은 호텔 밖으로 나갔다. 돌아오는 손에는 물론 술병이 들려 있다. 튀르키예 전통주라는 ‘라크(Riki)’. 도수가 높아 그냥 마시기는 힘들고 물을 타야 한단다. 한잔 따라 물을 조금 부으니, 뿌옇게 된다. 꼭 밀키스 같은 색이다. 한 모금 마시자, 목이 타는 듯하며 냄새가 진하다. 단 맛이 전혀 없는 생전 한 번도 맛본 적이 없는 그런 맛이다. 딱 한 모금으로 끝난 술자리.

온천탕에 들어가기 위해 입었던 수영복에서는 그야말로 흙탕물이 나온다. 헹구고 또 헹구며, 피부는 괜찮을까 싶다. 밖에서는 아직도 음악 소리가 들리고 간간이 이어지는 웃음소리도 들린다. 뒤척거리는 낯선 곳. 그래도 다음날 아침은 9시 10분에 만날 예정이니 마음은 좀 느긋하다.


잠들지 못하는 세계의 여행자들을 위한 찬란한 유적들의 잔해와 역사와 이야기가 가득한 곳, 에페소. 성경의 한 모습으로 튀르키예 변방에서의 하루가 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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