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의 석회암, 파묵칼레(Pamukkale)를 찾아서
아침 시간은 느긋하다. 호텔 조식 시진이 카톡으로 도착했다. 비슷한 색깔의 쨈들 위에 친절하게 이름이 붙어 있다. 장미. 딸기. 깨. 꿀. 라즈베리. 살구. 블랙베리. 오렌지. 깨와 장미쨈이 궁금하다. 차이 한 잔과 커피 한 잔 놓고, 플레인 요구르트 위에 장미향 쨈을 조금 올려 먹어본다. 장미 꽃잎도 약간 씹히며 색다른 맛이다. 장미 꽃잎도 식용이라는 건, 튀르키예에 와서 처음 알게 된 사실이다. 빼놓을 수 없는 올리브 피클, 오이와 요구르트를 섞어서 만들었다는 죽 한 그릇까지 거한 아침 식사. 점심이 늦어질 수 있으니 든든한 조식을 하라고 했던 우재 가이드의 말을 잊지 않았다.
숙소에서 멀지 않은 곳, 도착지는 빨간 물이라는 뜻의 크르므즈 수, 레드 스프링스, 말 그대로 붉은 온천수. 크기는 20명 정도 들어가 서 있을 만큼 작다. 발을 담근다. 바닥은 약간 미끄러웠고 위로 올라갈수록 뜨겁다. 유황성분과 철분을 많이 함유하고 있어 붉은색을 띤다. 옆에는 음용할 수 있는 온천수도 있는데 칼슘과 마그네슘 함량이 높아 꼭 마셔 볼 것을 권했다. 그러나 약간 뿌연 색의 탁한 물은 구미가 당기지 않았고 혹시 배앓이라도 하게 될까 봐 사양했다. 족욕처럼 발을 담그고 위로 올라가며 손도 담가본다. 금세 피부가 부드러워지는 느낌.
다시 버스를 타고 휴양도시 히에라폴리스(Hierapolis)로 향한다. 온천물이 좋아서 형성되었던 도시는 14세기까지 사람들이 살았으나 이후 지진으로 붕괴되어 소멸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온천을 이용한 관광업에 종사하는 주민들 뿐. 아주 작은 소도시. 마을의 입구를 통해 유적지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길의 경사는 완만했지만 비포장 돌길을 한참 걸어 올라가야 했다. 마을의 꼭대기쯤 가면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명인 성 필립의 순교지와 기념 성당 유적이 남아 있다. 표지판만 인증샷으로 남겨둔다.
이어 원형극장. 보존 상태가 아주 좋다. 그러나 한 달째 이름난 유물들을 보고 다닌 탓에 그 감흥이 별로 없다. 만약 이걸 처음 보았더라면 ’그 옛날에 이렇게 큰 원형 극장이? 보존도 엄청 잘됐네’ 하면서 충분히 호들갑을 떨었을 곳.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여 비슷한 유적들을 좀 보았다고, 벌써 이리 감흥이 반감되었을까 싶다. 돌아 나와서,
드디어 그림엽서에서 보았던 파묵칼레에 도착했다. ‘목화의 성’이라는 의미란다. 목화처럼 탄산가스 기포가 뽀글뽀글 올라오며 만들어진 석회암의 퇴적층. 어쩌면 하얀 목화 꽃이 퐁퐁 터지며 개화해 만개하는 모습일 수도 있겠다 싶다. 그래서 목화의 성일까? 전체가 하얗게 생겼으니 말 그대로 목화밭 온천 도시라고나 할까. 오랜 세월을 두고 35-36도 의 따뜻한 지하수가 수천 년이 넘도록 산의 경사면을 따라 흘러내렸고, 물에 포함되어 있던 석회질이 지표에 퇴적되면 생긴 층. 멀리서 보면 하얀색의 계단 같지만 가까이 가서 보면 불순물들이 들어간 얼룩이 많이 있다. 성분의 함량에 따라, 푸른색을 띠기도 하고 누런색을 띠기도 하지만 멀리서 봤을 땐 온통 하얀 설산의 계단 같은, 신비한 곳. 그 하얀 설산 사이로 작은 개미 같은 것들이 움직이는데, 그 움직이는 것들이 사람들. 줄을 지어 가고 있는 모습이다. 그만큼 관광객이 많이 오는 곳. 온천 안으로는 신을 벗고 들어 가는데, 맨발로 밟는 석회 온천의 바닥은 까끌거리며 딱딱하고 또 미끄럽다.
나도 신발을 벗고 들어갔다. 온천의 입구 아주 얕은 곳에 발을 디뎠는데, 넘어졌다. ‘아차’하는 순간이었다. 반바지와 남방까지 졌었다. 그야말로 물에 빠진 생쥐 꼴. 내가 넘어지는 걸 본 젬마는 지레 겁을 먹고 바로 돌아 나갔고, 남편은 내가 어디 다치지는 않았나, 걱정하며 덩달아 더 이상 안쪽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놀랬을까 봐 찬물 한 병을 사 온다. 온천을 즐기는 자유 시간은 2시간이었다. 넘어진 후유증으로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아 온천을 바라보며 사람 구경을 할 뿐이다. 앉아 있는 동안 옷은 다 말랐다.
넘어지면서 왼손으로 바닥을 짚었던 모양이다. 왼 손 약지가 조금 붓는다. 움직일 때마다 통증도 있다. 진작 얼음찜질을 했더라면 싶다. 넘어진 직후엔 아무렇지도 않았었는데… 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를 빼 지갑에 넣었다. ‘부러졌나?’ 움직여 보았지만 통증이 그렇게 심하지는 않다. 참으며 다음 곳으로 가기 위해 버스에 오른다.
1시간쯤 갔을까. 살다 호수(Salda Lake)에 도착했다. 바다 같이 넓은 호수가 멀리 보인다. 여기서 점심식사를 하고 자유시간 동안 호수에 들어갈 수 있다. 푸르고 맑고 고운 물색과 푹신할 정도로 부드러운 바닥. 튀르키예의 몰티브라고 불릴 만큼 아름답다. 화성과 비슷한 지형을 갖고 있다고 알려진 살다 호수는 여의도의 15배 정도의 넓이란다. 안전띠가 쳐 있어 그 안에서는 수영이 가능하다. 발을 담그며 수영복을 꺼내놨더라면 하는 생각을 잠시 했지만 물은 생각보다 차가워 부드러운 물속을 왔다 갔다 걷는 것으로 대신한다. 우재 가이드는 우리들의 인생샷을 건져 주기 위해 동분서주 바쁘다. 우리 일행 중에 있었던 꼬마친구는 그야말로 신나게 물놀이를 한다. 즐거움을 바라보는 흐뭇한 마음. 우리들의 나이 때문인 것도 있겠지만 자연과 어우러지는 시간의 소중함을 알고 있기 때문 아닐까?
물놀이가 끝나고, 안탈리아(Antalya)로 향하는 길. 지평선 끝으로 이어지는 나즈막산 산들과 하늘도 참 푸르다. 하늘인지 호수인지 구분이 안 되는 어느 지점을 바라보며 천혜의 땅이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이어지는 고속도로와 지방도로. 잘 정돈돼 있고 길도 시원하게 넓다. 이스탄불을 벗어난 뒤, 튀르키예의 지방 도시들을 만나며 자연이라는 인프라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모이게 하는구나 싶다. 넓고 비옥한 땅에서 자연을 관광자원으로 잘 이용하는 나라인 것 같다. 어쩌면 내가 튀르키예에 대해 잘 몰라 눈으로만 보고 느끼는 감정일 수도 있겠지만…
어떤 이들은 튀르키예의 정치와 경제가 망가져 ‘희망’이 없다고 했다. 한국의 80년대나 90년대처럼 산업 발전에 애를 쓰지만 에르도안 대통령이 장기집권으로 독재를 하고, 이유 없이 돈을 풀어, 경제를 망친단다. 하지만 잠시 다녀가는 여행객들의 시선에는 그리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단지 하나 불편했던 것은 담배를 너무 피우는 것이다. 실내에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담배를 피우고, 히잡을 쓰고도 담배를 피우는 젊은 여성들을 보며, 이런 건 좀 고쳐야 되지 않나 싶다. 튀르키예인들이 손에 뿌리는 향수 겸 손 세정제인 콜로나(Kolonya)를 쓰게 된 것도 흡연 후 손 냄새를 줄이기 위해서였다는 설도 있단다. 또 하나, 신기하다고 해야할까? 고양이의 낙원이란 느낌. 고양이 천국으로 불리는 튀르기예. 우재 가이드는 ‘다시 태어나면 튀르키예 고양이’가 되고 싶다는 농담을 할 정도로 고양이 대우가 좋다. 이슬람 문화는 청결한 것을 좋아한단다. 동물 중에 가장 청결하고 혼자 대소변을 처리하는 고양이를 그래서 좋아한단다. 어디에서도 길 고양이가 그야말로 넘친다.
안탈리아 구도심의 숙소. 짐을 풀고 쉬려는데 아까 다친 왼쪽 약지가 제법 부었다. 나무 젓가락을 잘라 일회용 반창고로 감아 작은 부목을 만든다. 우재가이드가 파스가 있다고 했던 생각이 나, 카톡을 했다. 걱정스럽게 많이 아프냐고 묻는다. 응급용 약품들은 버스에 실려 있는데, 마침 버스가 정비를 받으러 갔단다. 버스가 돌아오는 대로 바로 갔다 준단다. 그러라고 했는데, 방에 벨이 울린다. 밖으로 나갔더니 우재 가이드. 커다란 파스 손에 들고. 버스 올 때까지 기다리면 안 될 것 같아 밖의 편의점에서 사 왔단다. 돈도 안 받는다. 알맞게 잘라 손가락에 붙이며 그의 마음씀이 고맙다. 하룻밤 쉬고 나면 나아지겠지.
고양이 천국에서, 담배 연기 자욱한 골목에서, 파묵칼레의 밤은 깊어간다. ‘신들의 휴양지’라는 안탈리아의 아침은 어떤 모습으로 우릴 기다리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