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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지은 Mar 14. 2022

죽을 때 후회하는 한 가지, 하고 싶은 것 다 할걸..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아. 힘들면 힘들다고 소리쳐

    

    


가게 매장을 정리를 하던 중이었다. 그때 눈물이 범벅인 채 사색이 된 H가 뛰어 들어오면서 급하게 날 찾았다.


“글라라, 글라라, 글라라.” 


숨이 넘어갈 듯 불렀다. 난 그 소리에 가슴이 쿵 떨어졌다. 큰일이 난 것이 틀림없었다. H는 배달을 나갔던 직원이었기에, 무슨 일이 났구나 싶었다. 일단 H에게 안정을 찾아줘야겠구나 싶었다. 


“무슨 일이야? 깊이 숨 한번 쉬고 천천히 말해.”


“형이… 우리 형이 세상을 떠났다고 전화가 왔어요” 


H는 내게 말하는 내내 사시나무 떨 듯 떨고 있었다. 얼른 생수병을 하나 찾아와 쥐어 주며 H를 꼭 안아주며 말했다.


“어서 집에 가봐. 물 한 모금 마시고, 운전 조심하고…” 


H는 주차장을 향해 달리기 선수처럼 뛰어가 차 문을 열었다. 서서 바라보는 나와 또 다른 종업원들은 H의 차가 떠나는 것을 보고서야 다시 자신이 일하던 자리로 돌아왔다. 우리는 그냥 망연자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H는 우리 가게에서 일을 한 지 1년 정도 되었다. 한국에서 입양되어서 왔다는 H는 생김새만 우리와 똑같은 한국 사람이지, 미국인 부모 밑에서 자란 완전한 미국 아이였다. 한국 사람이 하는 가게이고, 자신과 닮은 사람이라는 생각 때문일까. 아이는 참으로 열심히 일했다. 


H는 성실한 아이였다. 부지런해서, 1초도 쉬지 않고 뭔가를 하기 위해 움직였다. 가게를 운영하는 입장에서 열심히 하는 직원이 예쁠 수밖에 없다. 더구나 한국에서 온 입양아라는 것에 늘 마음이 갔다. 그래서 우리 부부도 한국에 대한 나쁜 이미지를 주지 않기 위해 참 애썼다. 가끔 한국 음식을 가져다 주기도 하고 한국말을 가르치기도 했다. 마음속으로는 아이가 시간이 되어 친부모를 찾겠다고 하면 도와주려는 생각도 했다.


지난 연말, 아이를 입양한 미국 부모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전형적인 금발의 미국인 부부였고, 인자한 미소가 몸에 밴 분들이었다. 나는 그렇게 인사했다. “한국 아이를 입양해서 이렇게 훌륭하게 키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부부는 “우린 이 아이들을 키우면서 가족을 만들어 가는 게 이렇게 엄청난 사랑인 걸 알게 되었죠.  아이들은 모두 기쁨이고 행복이죠.”라고.


부부를 만난 뒤 알게 된 것은  H는 사 남매 중 막내라는 것이었다. 위로는 형 둘과 누나 한 명이 있는데, 모두 입양아들이었다. 둘은 헝가리에서, 둘은 한국에서 입양되었다고 했다. 위로 셋은 아이보다 훨씬 나이가 많고, 부모님은 내 나이와 비슷한 듯했다. 


H가족의 생활 중심은 교회였다. 이곳으로 이주를 해 온 것도 가까운 곳에 믿음이 신실한 교회가 있어서, 그곳에서 봉사를 하기 위해 은퇴를 하고 이주해 왔다는 것이다. 다른 형제자매들은 다들 장성해 각자의 가정을 꾸리고 있으므로 막내인 자신만 부모를 따라 이주해 왔고, 현재는 독립해 룸 메이트들과 살고 있지만 주말이면 부모님 댁에 가서 같이 교회를 가고, 부모님이 필요한 것들을 돕고, 주중에는 우리 가게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대학을 졸업했는데 왜 전공을 찾아서 일을 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비슷하게 생긴 사람들을 만나서 일을 하는 게 편해서라고 확실하게 말을 했던 아이. 아이가 받았을 충격이 얼마만큼의 무게가 되어 아이를 힘들게 할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오후, H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필요한 만큼 쉬어도 괜찮아. 부모님 곁에서 위로해 드리고, 울고 싶으면 울고…’. 


다음날 아이가 전화를 걸어왔다. 부모님 댁에 있고, 잠을 못 자서 정신이 없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이달 말까지 쉬고 싶단다. 물론 그렇게 해도 좋다는 대답을 하면서, 너라도 정신 차리고 부모님 곁에 있으라고 몇 번이나 강조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일주일 후, 아이가 가게에 왔다. 수염도 깍지 않고, 부스스한 몰골이었다. 


목숨을 끊은 형은 H보다 18살이나 많았다. 결혼을 해 아이를 4명이나 두었다. 우울증이 오래되었는데 먹던 약의 부작용이 심해지며 환청과 환시가 심해지는 것 같아, 약을 바꾸는 중이었고 결혼생활에 문제가 많아 늘 고심을 했던 상황이었다고 한다. 


그동안 아이는 형을 많이 의지했었다. 같이 한국에서 입양이 되어 왔다는 동질감이 그들을 더 가깝게 했고, 부모님과 세대 차이를 형을 통해 극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형이 더 부모 같았다고 말하며 또 눈물을 글썽거린다. 아이를 가만히 안아주며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냥 그렇게 안아 주는 것이 그에게 어떤 위로가 될지 알 수는 없지만, 상황을 잘 알지 못하는 나는 해 줄 수 있는 말이 아무것도 없었다. 


죽음을 준비하는 용기로 사는 일을 좀 더 생각해 볼 수는 없었을까. 남겨질 가족과 아이들에게 줄 상처는 생각하지 않았을 그의 이기심에 화가 났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화가 나는 것은 아픔을 평생 안고 갈 그의 동생이 내 가까운 곳에 있기 때문이다. H의 상처는 보통의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깊을 수 있다. 성장 과정 중에 만났을, 자신의 정체성에 힘들었을 그가 형을 의지하며 털어놓았던 아픔들. 둘 다 누구에게서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했을 그 고통을 공유하며 기댈수 있었을 텐데…  


가족 중 가장 자신과 닮은 형을 얼마나 의지 했었을까.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그 관계를 모질게 끊고 가다니. 철이 들며 알게 되었을 아이의 삶의 상처는 시간이 지나며 조금씩 단단한 딱지를 만들었을까? 겉으로 보기에는 아물었을까? 그러나 형의 죽음으로 인해 그 상처는 다시 송곳 같은 것으로 파내는 듯 벗겨졌고 딱지 밑으로 조금씩 돋아나던 새살은 다시 문질러지며 쓰리고 아릴 것이다. 어쩌면 지난 시간보다 훨씬 긴 시간을 다시 견디어야 하고 쉽게 아물지 않을 수도 있다. 상처 아래로 피고름이 잡히는 일은 없기를 바랄 뿐이다.






어제 H는 다시 가게에 들렸다. 토요일이 장례식이라고 했다. 가족만 모여서 할 작은 장례식. 형이 남긴 유서라며 사진으로 찍어온 것을 내게 보여준다. 




H에게.

형이 먼저 가는 곳은 아무도 가보지 않은 곳이라 무척 두려워. 그래도 한번 가보려고 해. 왜냐고? 사는 게 너무 힘들었어. 철들며 부모님들과 다르게 생겼고, 누나와도 다르게 생겼다는 것을 알고 난 다음부터야. 입양아라는 딱지. 참 힘들었어. 내색을 못했던 건 너도 알 꺼야. 너도 나처럼 내색을 안 했으니까. 


착한 누군가가 날 주워다가 잘 길러 주었지만, 그분들이 감사하지만, 감사한 것 이전에 버려진 것이 먼저였어. 왜 버렸을까. 그들은 누구일까. 그들은 무슨 자격으로 날 버린 걸까. 


부모님들께 잘해야 한다는 강박 비슷한 생각도 늘 있었어. 그들이 날 데려다 길러 줬고, 학교도 보내주고 내가 이곳에서 살 수 있도록 커다란 울타리가 되었잖아. 부모님께 차마 물어볼 수 없었어. 어떻게 날 입양하게 되었느냐고, 나의 친부모는 누구냐고, 그냥 부모님에 대한 고마움 때문에 모든 것을 참고 또 참아야 했지.


사실 난 모범생이고 싶지 않았어. 남들처럼 그 시대에 유행했던 펑크 머리에 온몸에 문신, 피어싱, 마약을 하고 거리를 떠돌며 닥치는 대로 살고 싶었어. 그러나 그렇게 할 수가 없었지. 부모님이 나한테 어떻게 해 주셨는데. 생면부지의 아이를 데려다가 입히고 먹이고 학교 보내고 교회에 데리고 다니고 모범생으로 만들었잖아. 이른 나이에 가정을 꾸리겠다고 하자 전폭 지지도 해 주시고. 그들의 기대를 저버릴 수가 없었지. 그래서 난 그냥 억지로 참고 또 참고 견디며 살았던 거야.


H, 넌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아. 힘들면 힘들다고 소리쳐. 네가 누군지 알고 싶으면 친부모를 찾아봐. 너를 버린 그들을 찾아서 무슨 이유였는지 소리치며 물어봐. 소리를 지르고 나면 좀 시원해질 거야. 소리를 지르지 못했기에 쌓이는 이 감정들이 지금의 나를 미치게 해. 그래서 아내와 아이들에게 더 모질게 굴었는지도 몰라. 어쩌면 내 우울증은 이런 참는 것 때문에 생겼을 수도 있어.


H, 부탁이야, 나처럼 참고 견디지 말고 쏟아내. 그래야 사람이 살 수 있어. 그런 너절한 것들이 우스워 보일 수 도 있지만 그런 것들을 해 봐야 후회가 없고 더 단단해진다고 나는 믿어. 난 그런 것들을 못하고 안으로 안으로만 감추어 두었기에 이렇게 무너지는 거야. 


그러니까 참지 말고. 모든 게 다 괜찮다는 생각을 버리고, 하고 싶은 대로 제발 좀 해. 그래야 살 수 있어. 그게 네가 살기 위한 방법인 거야. 이 노트를 쓰고 있는데 막내가 우네. 그만 쓸게.




아이가 형의 노트를 왜 나에게 보여 주었는지 알 수는 없다. 한국인이라는 동질성 때문에? 아니면 우리가 자기를 보호해 주거나 훗날 한국의 친부모를 찾을 때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 때문에? 그도 저도 아니면 그냥 누군가에게는 풀어놓고 싶기 때문에? 많은 생각이 들었다.


일단은 아이가 돌아온 것이 고마웠다. 삶의 의욕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하나가 가장 큰 일이었기에.  그리고 형의 노트를 사진 찍어서 나에게 보여 준 것은 도움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라고 믿는다. 언제라도 H가 준비가 되어 친부모를 찾겠다고 한다면, 기꺼이 도와주겠다는 다짐도 한다. 


단지 아쉬운 것이 있다면, 그의 형이 진작에 누구에게라도 도움의 손길을 청했다면, 이런 아픈 시간을 만들지 않았을 수도 있는데 하는 것이다. 죽음을 앞두고 형은 하고 싶은 것들은 마음대로 못하고 살았던 것이라는 후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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