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더 힘들까
하는 사람이 더 힘들까, 듣는 사람이 더 힘들까?
성격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라면 차라리 듣는 편이 낫다. 아직 자식이 없어서 내가 잔소리를 할 사람이라곤 남편이나 동생뿐이지만 남편은 영어로 해야 해서 한국어 잔소리만큼 강도가 세지 않으니 진작에 패스이고, 동생은 잔소리했다가는 자매의 연을 끊을 수가 있기에 보통은 입을 다무는 편이다. 나에게 잔소리를 하는 사람이 있다면 보통은 엄마인데, 딸내미가 타국에 나가 있으니 보통은 걱정 어린 안부 인사가 대부분이다. 사랑의 언어 폭격은 나보다는 보통 동생이 많이 듣는 편이었는데, 잔소리 빈도가 x축이고 말썽 없이 잘 자란 게 y축이라면 분명 이건 정비례의 그래프는 아니다. 동생은 더 기를 쓰고 반항하고 부모의 가슴을 후벼 파면 팠지 네네 굽신거리며 듣는 척을 하진 않았던 것 같다.
나 또한 자식을 낳으면 잔소리할 자신이 없다. 이건 사랑만 있어서 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오랜 시간 떠들기 위해선 체력도 되어야 하고 할 말도 끊임없이 머릿속에서 생성되어야 한다. 그리고 투자한 에너지에 비해 자식들 또는 배우자가 내는 결과가 썩 좋지 않으니 그다지 효율적이라고 느껴지지도 않는다. 하지만 자식을 낳아보지 않은 입장에서 부모 마음을 어찌 알겠으랴. 엄마는 동생에게 너 같은 딸 낳아서 키워봐야 안다고 하시는데, 그 말이 정말인 것 같다. 부모가 주는 사랑의 메시지이지만 항상 자식에게 닿는 것 같진 않아서 한편으로는 좀 쓸쓸한 느낌도 있다. 부모의 생각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지만... 자식이 좋은 길로 갔으면 하는 마음에 안 들을 걸 알면서도 그렇게 하고 또 하는 거겠지.
그럼 현명한 전달법은 대체 무엇일까? 자식이 성인이 되기 전엔 부모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에 반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성인이 되고 나서는 부모도 더 이상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기에, 먼저 인생을 경험한 조언자의 역할만 하면 좋을 것 같다. 직접 개입하지 않고 한 발짝 떨어져서 말이다. 예를 들어 자식이 걱정되는 행동을 하려고 할 때, 그것이 초래할 수 있는 결과를 예측해 주고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부모 자식 간의 신뢰가 두텁고 대화 습관이 건강하게 형성되어 있다면 충돌이 있을 때 자식은 부모를 설득하거나 부모의 생각을 인정하고 대안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에.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면 자식이 스스로 책임질 수 있게 도와주고 반성의 기회를 주는 것이 현명하고 이성적인 부모의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아직도 잔소리하는 사람이 더 힘든지, 듣는 사람이 더 힘든지는 결론을 못 내리겠지만 사랑을 전제로 서로를 힘들게 하기보다는 진지하고 건설적인 대화를 통해 합의점을 찾는 것이 문제 상황에서 궁극적인 목표가 되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