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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함께 걷는 길

by 봄비


셋째딸을 낳고는 문득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무엇을 위해 이 도시에서 아등바등 살아가는 것일까?’ 의문이 들었다. 남편과 고민을 나누고 많은 이야기를 한 끝에 우리는 귀농을 결심했다. 어릴 적 시골에서 살았던 정서가 내게 안정감을 주고, 문학적 감수성을 키워줬다는 걸 기억하며 자연 속에서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면 살 길이 있지 않겠느냐고, 우리 아이들에게 다른 유산은 물려주지 못하겠지만 자연을 선물해 주자며 내린 결정이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큰딸을 보며 공부공부 하고 싶지 않았는데 어느새 아이의 성적에 초조해하고, 아이와 나에 대해 동네 엄마들이 이런저런 말 하는 것을 듣고 흔들리는 나를 보면서 더 이상 이대로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어렸을 때부터 아토피로 고생하는 딸이 자연 속에서 건강한 먹거리를 먹으며 산다면 좀 더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기에 결정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그렇게 10년 전인 2009년에 뜻을 같이하는 농촌공동체가 있는 충북 보은에서 시골살이를 시작했다.

보은에서도 18km 들어오는 이곳 대원리는 땅이 고르지 않고 돌들이 많은 데다 논과 밭이 따닥따닥 붙어 있어 농기계를 사용하기도 쉽지 않은 곳이다. 이곳에서 농약과 비료, 제초제를 쓰지 않으며 농사 짓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생태적인 삶을 꿈꾸기에 땅을 살리려고 우리가 빌려 농사 짓는 논과 밭은 친환경농법으로 땅을 일구고 농작물을 키워낸다. 그래서 큰 수확을 얻지 못할 때가 많다.

마을 어르신들이 보기에 어쩌면 우리는 어리석고 게으른 초짜배기 농부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매년 밭에 무섭게 올라오는 풀을 다 감당하지 못해 농작물보다 더 크게 자랄 때는 어르신들이 지나가며 한소리 하신다.

“아, 그 약 한 번 치면 되는 걸 왜 그리 고생혀?”

그럴 때 우리는 다른 대답을 할 수 없다.

“그러게 말여유.”

하고 허탄히 웃기만 한다.

7년 전부터 우리집이 빌려서 농사짓는 논은 마을에서도 물이 많기로 소문난 고래실논이다. 고래실논이라고 하면 옛날에는 물이 많아서 좋은 논이라고 했지만 지금은 수로의 물을 쉽게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물이 너무 많아서 질논이 되어버려 오히려 농사짓기 힘든 논이다. 논장화를 신고 들어가면 발이 푹푹 빠져 발을 떼기 힘들다. 그래서 로터리를 쳐서 논을 삶기도 힘들고, 물이 많아 가장자리에 심은 모들은 물 위에 떠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거나 물에 빠져 녹기 십상이다.

모가 물에 잠겨도 안 되지만, 모가 심겨진 땅이 물 위로 드러나도 안 된다. 그러면 단박에 피가 나기 때문이다. 피가 나기 시작하면 정신이 없어진다. 모가 작을 때는 피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비슷해서 뽑기 힘들고, 모가 커지면 피는 더 커져서 구분하기는 쉽지만 논에 뿌리를 깊이 내렸기 때문에 뽑아내기가 힘들다. 그만큼 한 해 논농사는 땅이 평평한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매우 많이 달라진다.

3년 전에는 논의 평탄작업이 잘 안 된 데다가 물이 너무 많고 질어서 논의 한 부분은 도저히 이앙기로 모를 심을 수 없어 손모내기로 겨우 모를 심기도 하였다. 물론 공동체 이웃들이 도와주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바쁘고 고된 농사철이어서 시간 내기 힘든데도 햇살이 비껴가는 이른 아침과 늦은 오후에 삼삼오오 모여 함께 손으로 모를 심어주었다. 오히려 그 해의 모들이 튼튼하게 심겨져 더 많은 쌀을 수확하기도 했다.

논 두둑을 만들거나 시기에 맞춰 논의 물을 채우고, 빼는 일은 대부분 남편이 알아서 하는데 모때우기와 피뽑기는 내가 도와주지 않을 수가 없다. 남편 혼자 하면 일주일 넘게 걸릴 일이 내가 도와주면 더 빨리 끝낼 수 있기 때문이다. 농사도 타이밍이어서 때가 있는 법이다. 모때우기를 빨리 하지 않으면 모판에 남아 있는 모들이 쉽게 누래지고, 앞에서 말했듯이 논의 피도 빨리 뽑지 않으면 피가 하루가 다르게 커져 뽑기가 더 힘들어지고, 피의 씨들이 떨어져 다음해 농사에까지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때우기와 피뽑기는 허리를 굽혀 해야 하는 일이기에 허리가 약한 나에게는 고역이 아닐 수 없다. 어느 해인가는 논의 피가 너무 많아서 남편과 내가 몇날며칠을 해도 도저히 감당이 안 되어 큰딸에게 도움을 청해 함께 피를 뽑기도 했다. 우렁이농법으로 벼농사를 짓기 때문에 우렁이가 논의 피를 갉아먹어야 하는데 피가 어찌나 많은지 우렁이들이 논의 피를 다 감당하지 못할 정도였던 것 같다.

그래서 매년 봄이 되면 가슴이 콩닥콩닥 뛴다.

‘올해 논농사는 어떻게 될까?’

‘제발 평탄작업이 잘 되어 모때우기 할 것도 적고, 피도 나지 않아야 할 텐데‥’

하고 조바심이 난다.

다행히 작년과 올해는 써레질을 할 필요도 없이 논이 잘 삶아져 이틀 만에 모심기를 끝내고, 모때우기를 많이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잘 심겨져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10년 농사일에 허리가 약해질 대로 약해져 이젠 모때우기도, 피뽑기도 할 수 없을 정도가 되어 남편을 도울 수 없기 때문에 더 마음이 애탔었다. 논 두둑을 만들고 써레질 하는 것만으로도 녹초가 되는 남편을 바라보기가 얼마나 안쓰러운지 모른다.

농사 지은 지 오래 된 마을 어르신들이 허리가 굽고, 무릎과 다리 등의 통증으로 아파하는 모습을 볼 때 10년 후, 20년 후 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착잡할 때도 있다. 그러나 몸은 고되어도 건강한 쌀과 고추, 감자들을 추수할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또 우리의 건강뿐 아니라 우리가 정직하게 농사지은 농산물을 도시의 소비자들에게도 함께 나누어 그들의 건강까지 책임지는 일이니 우리의 일은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가?


우리 아이들은 도시의 아이들이 누릴 수 없는 것들을 얼마나 많이 누리고 살아왔는지 모른다. 세 딸들은 고추나 감자를 심을 때도 엄마아빠와, 공동체 이웃들과 같이 심고, 또 추수할 때도 콤바인이 들어가는 길목의 벼들을 미리 낫으로 베는 갓도리를 하고, 타작을 끝낸 벼들을 거두는 일을 도우며, 한겨울 먹을 김장김치를 이웃들과 같이 담그면서 함께 살아가는 법을 알아갔다. 봄이면 마을 연못가에 열린 보리수와 앵두, 오디를 따먹으며 자연과 하나 되는 법을 배웠고, 여름이면 마을 아이들과 냇가에 뛰어들어 어린 치어들을 잡았다가 놓아주고, 물장구를 치면서 더위를 이겨냈으며, 가을엔 숲길을 걸으며 밤을 줍고 초록빛 잎들이 형형색색 단풍으로 물들어가는 것을 보았으며, 겨울엔 친구들과 내리막길에서 눈썰매를 타고 눈싸움을 하며 자라갔다.

열두 살에 이곳에 내려온 첫째는 대학생이 되어 장애인이나 치매어르신, 연약한 사람들을 음악으로 치료하기 위해 공부하고 있다. 첫째가 음악치료 공부를 하게 된 것은 이렇게 시골에서 이웃들과 어울려 살아온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보다는 남을 위한 삶, 연약한 사람들도 함께 어울려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삶을 살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심하던 아토피도 이곳에 내려와 건강한 먹거리를 먹고, 좋은 공기를 마시며 점차 좋아졌다. 대학 입시를 준비하며 스트레스로 다시 심해지기도 했지만 건강한 식단을 유지하고 숲길을 걷는 운동을 꾸준히 하면서 아토피를 이겨냈다.

그래서인지 우리집 세 딸들은 가끔 도시에 가면 모두 입을 모아 도시에서는 못 살 것 같다고 말한다.

“엄마, 왜 이렇게 아파트가 많아요? 여기도 아파트, 저기도 아파트, 너무 답답할 것 같아요. 나는 나중에 이렇게 공기 안 좋은 데서는 못 살 것 같아요. 아빠, 나중에 시골에 집 좀 지어주세요.”

하고 말이다.

물론 미래는 알 수 없지만 나도 세 딸들이 가능하면 시골에서 살았으면 좋겠다. 씨앗을 심고 땅을 살리며 열매를 거두는 기쁨을 함께 누렸으면 좋겠다.


농촌에서의 삶 중에 가장 신나는 일은 나물 캐기이다. 내가 심지도 않았는데 산에서 들에서 나물들이 자라며 향을 내뿜는다. 그러면 나는 고마운 마음으로 나물을 캐고 뜯는다. 특히 맨 손으로 산나물을 뜯으면 나물의 향이 내 온몸의 세포들을 깨운다. 냉이와 쑥은 물론이고 고들빼기, 달래, 질경이, 미나리, 취나물, 거렁대, 은어리, 고사리, 뽕잎순, 머위 등을 캐고 뜯어서 다듬고, 흙을 털어내기 위해 물로 여러 번 씻어내는 일은 힘들다. 하지만 마트에서 사먹는 깨끗이 다듬어진 채소와 나물과는 비교가 안 된다. 그 신선한 맛과 향은 누구에게도 뺏기고 싶지 않다. 소금과 들기름으로만 무쳐도 얼마나 맛있는지 입안 가득 나물의 향과 맛이 퍼지면 내 몸의 끈적거리는 피들이 선홍빛으로 맑아지는 듯하다.

특히 첫째가 대학입시를 준비하면서 아토피가 심해졌을 때 산나물을 뜯어 도시락을 싸주고, 시금치 대신 냉이나 거렁대, 은어리 같은 나물을 넣은 산나물김밥을 싸서 먹기도 했던 기억을 잊을 수가 없다. 장갑도 안 끼고 산을 헤치며 나물을 뜯어서 가시로 팔이 긁혀 쓰라릴 때도 있고, 가끔 손가락에 가시가 박히기도 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나물을 뜯고 나면 오른손 검지가 시커매져서 며칠이 지나야 물이 빠지기도 한다. 매년 봄이면 산나물 뜯어먹는 재미에 푹 빠져 봄이 빨리 지나가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올해는 쑥을 뜯어 이웃들과 같이 다듬고 쑥을 데쳐서 쑥개떡 반죽과 쑥절편을 뽑아 먹었다. 또 어버이날을 맞아 쑥설기를 해서 마을 어르신들의 집에 한 덩이씩 나누어 드리기도 했다. 쑥 양이 워낙에 많아서 다듬는 시간이 오래 걸리고, 데치고 씻는 일도 쉽지는 않았지만 공동체 이웃들이 함께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면서 쑥을 다듬었더니 손이 무섭다는 말이 있듯이 혼자 하면 며칠이 걸릴 일인데 몇 시간 만에 끝낼 수 있었다. 마을 어르신들도 맛있게 먹었다고 하시니 힘이 난다.

봄의 들과 산은 먹을 것이 지천이지만 그만큼 수고도 따른다. 효율적이지 않고 경제적이지 않은 일일 수도 있지만 수고 끝에 얻는 행복은 누구나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골에서 농사 지으며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만이 누릴 수 있는 기쁨과 행복이다. 이러한 기쁨과 행복을 나 혼자만이 아닌 이웃들과 함께 나누어갈 수 있기에 이 삶이 더욱 값진 것이 아닐까 한다. 부침개를 하고, 나물을 무쳐 이웃들과 함께 나누어 먹는 기쁨이 크다.

어쩌면 누구에게는 어리석어 보이고, 능률적이지 않은 일이겠지만 땅을 살리려고 애쓰며 나아가기 위해 천천히, 그러나 함께 걷는 이 길은 충분히 걸어갈 가치가 있기에 오늘도 나는 이 길을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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