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추억은 가장 아름다운 기억

by 봄비


한낮 뜨거운 태양의 지글거림이 수그러든 가을이다. 비 한 번 내리더니 키 큰 코스모스가 위태롭게 흔들린다. 어릴 적 초등학교 가는 길에 심었던 코스모스, 그때도 이렇게 키가 컸을까? 기억 속의 코스모스는 꺾이지 않고 가을바람에 살랑댔는데 요즘 코스모스는 키가 커서인지 조금만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려도 꺾여버리고 만다.

귀농해서 시골에 내려왔을 때만 해도 계절의 변화가 자연스러웠는데 15년이 지난 지금은 계절이 끝없이 이어질 것 같다가 어느 날 갑자기 후다닥 바뀐다. 봄, 가을은 점점 짧아지고. 여름과 겨울은 점점 극단적으로 덥거나 극단적으로 춥다. 기후 변화가 무섭다. 우리 아이들에게 물려줄 이 땅이 위태롭다.

자연 속에서 살고 싶었다. 아이들에게 자연이라는 선물을 주고 싶었다. 세 딸 모두 알러지가 있기도 했고, 무언가 아이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에서 벗어나고 싶기도 했다. 아이들이 스트레스 받지 않고 자연 속에서 마음껏 뛰어 놀며 자랄 수 있기를 소망하며 귀농을 했다. 나 또한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자랐기 때문에 시골이 주는 정서가 나의 마음을 풍요롭고 평안하게 해주었다. 딸들에게도 똑같은 선물을 해주고 싶었다.

결혼 12년차에 시골에서의 삶을 시작했다. 맨땅에 헤딩하는 것보다는 낫겠다 싶어 작은 마을에서 친환경농사를 짓고 농산물을 도시로 직거래 하며 살고 있는 농촌공동체에 합류하였다. 다랑이 논에다가 밭은 돌이 많아 농사 짓기 힘든 땅이었지만 땅을 살려보겠다는 가치를 지키고자 하는 이들이었기에 함께 해보기로 했다. 우렁이농법으로 무농약 쌀농사와 유기농 고추와 감자 등의 농사를 짓고, 유기순환 자연양계로 유정란을 생산, 판매하는 곳이었다. 쉽지 않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우선 부딪쳐 보자 했는데 해가 갈수록 어렵고 힘들다. 나이가 들어가니 몸에 부치고 여기저기 신호가 오기 시작한다. 허리는 물론 손목이 시리고, 손가락 통증도 심해진다.

처음에는 마을 어르신들이 의심의 눈으로, 때로는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IMF가 터진 후라 직장을 잃은 젊은이들이 내려온 줄 알고 불쌍하게 바라보다가, 농사를 짓는다고 하는데 농약도 치지 않고 논과 밭에 풀이 무성하니 얼마나 한심하게 보였겠는가. 또 홈스쿨 한다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으니 이상한 사이비가 아닌가 의심하기도 했을 터이다.

그 덕분에 우리 마을은 다른 어느 마을보다 아이들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홈스쿨을 해서 아이들이 대부분 집에서 공부하고, 마을에서 놀았기 때문이다. 마을 안골에 있는 산을 오르면서 꽃잎과 나뭇잎을 따서 책갈피에 꽂아 말렸다가 시를 써서 책받침이나 책갈피를 만들기도 하고, 여름엔 마을 개울에서 물놀이를 하고, 겨울에 눈이 오면 언덕에서 비료 푸대에 지푸라기를 넣은 눈썰매를 타기도 하였다. 또 고구마나 감자를 심거나 캘 때면 아이들이 모두 나와 함께 심고, 함께 캤다. 호미로 감자와 고구마를 찍어 상처가 나기도 했지만 아이들과 함께 일하면 훨씬 더 힘들지 않게 느껴졌고, 일도 빨리 끝나는 것 같았다. ‘손이 무섭다’는 말은 그럴 때 쓰는 말이리라. 일도 일이지만 일이 끝나고 난 후 우루루 몰려가 먹는 자장면 한 그릇의 맛은 꿀맛이었다. 어쩌면 아이들은 그 재미로 더 열심히 일을 했는지도 모른다. 어느 해인가는 감자를 캐서 판 수익보다 감자를 심고 나서 먹은 자장면값과 캐고 나서 먹은 자장면값이 더 많이 나와서 어이없이 웃기도 했다.

딸들이 좀 더 커서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고 보면 당시의 추억을 떠올릴 때마다 미소를 짓게 되지 않을까. 명절에 자매들이 모여 누군가 어릴 적 얘기를 꺼내면 사진 앨범처럼 주르륵 펼쳐질 추억에 작은 행복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사전적 의미로 ‘추억’은 지나간 일을 돌이켜 생각한다는 뜻이지만 넓은 의미에서 과거의 기억에서 인상 깊었던 기억을 의미한다고 한다. 인상 깊었던 기억을 떠올리는 것, 그것이 추억이다. 그런 의미에서 추억은 가장 아름다운 기억일 것이다. 어떤 단어나 사건을 만나면 떠올려지는 가장 아름다운 기억, 혹은 가장 아프고 슬픈 기억일 수도 있겠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풀을 뽑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