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한 동네 사시던 김익수 아저씨가 별세하셨다. 이제 팔순이 조금 넘은 연세에 폐암으로 몇 달 고생하시다 돌아가셨다. 작년 초부터 소화가 잘 안 된다, 몸무게가 자꾸 빠진다 하셨다. 읍내 병원에 가서 처방받은 약이나 드셨을까? 매달 마을 어르신들 생일잔치를 할 때 오시지 않아 남은 반찬만 몇 번 싸다드렸지, 큰 병원에 가보시라 말씀드리지 않은 게 후회된다. 꼭 오시라는 성화에 몇 번 생일잔치에 참석하셨을 때 좀 괜찮으시냐 묻지도 못하고, 잘 오셨다고만 했다.
뒤늦게 아들이 내려와 아버지를 모시고 큰 병원에 가보았지만 이미 폐암 말기라고 했다. 때늦은 치료를 시작했지만 늦어도 너무 늦어버렸다. 항암치료를 그만두고 요양병원에 들어가시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게 초겨울이었을까? 날이 따뜻해지면 한번 찾아뵈야지 했는데 봄을 기다리지 못하고 훌쩍 떠나셨다.
장례식장이 멀리 일산이어서 가보지 못했는데, 다행히 선산이 우리 마을이어서 장지에 다녀왔다. 요즘 장례에 드물게 7-8년 전 할머니가 그러셨던 것처럼 아저씨의 관을 땅에 묻었다. 아저씨는 할머니 곁에 묻혀서 외롭지 않으실까?
마을 어르신들이 한두 분 세상을 떠나가신다. 이 마을에 귀농한 지 16년차. 그동안 여러 분이 돌아가셨다. 팔십이 안 되신 노인회장님이 대장암으로 돌아가셨다. 노인회장님의 어머니가 101세까지 장수하시고 돌아가신 지 몇 해 지나지 않아 돌아가신 것이다. 죽음은 순서가 없다. 우리는 누구나 죽음 앞에 있다. 물론 누구에게는 영원한 이별이 될 수 있고, 또 누구에게는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출발점이 될 수도 있지만 지금, 현재 이땅에서 함께 숨쉴 수 없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김익수 아저씨는 마을에서 내노라하실 만큼 담배를 많이 피우셨다. 마을 연못정원 바로 앞이 아저씨네 집이어서 아저씨는 자주 연못 옆 정자에 나와 담배를 피우시곤 했다. 마을 친구들과 함께 술도 자주 마셨지만 술보다는 담배를 더 자주 피우셨다. 또 아저씨는 인사 잘 안 받기로 유명했는데 아이들이 어렸을 때,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하면 고개를 다른 데로 돌리며 담배를 피우시곤 했다. 물론 내가 인사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아저씨가 아이들이며, 나의 인사를 받기 시작했다. 어떤 때는 말을 걸기도 하셨다. 조금은 가까워졌다고 생각하신 걸까? 아니면 아저씨가 나이가 들면서 마음이 유연해지신 걸까?
할머니가 심근경색으로 먼저 돌아가셨을 때도 아저씨는 담담하셨다. 놀란 기색이 전혀 없었다. 마을 정자에 앉아 부침개를 부치면서 할아버지들 안주를 만들어 주시던 할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셨을 때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으셨다. 몇 해 후에는 큰딸이 암으로 먼저 세상을 떠나셨다는 걸 나중에야 들었다. 그때부터였을까? 할아버지 안색이 좋지 않았다. 세상 기쁨 다 걷어낸 사람처럼 하루하루 버텨내신 건 아닐까?
작년 10월 말 즈음, 할아버지 밭에 심긴 무를 뽑아가라는 연락을 받았다. 할아버지는 시래기를 말릴 무청만 필요하다며 무를 뽑아가라고 하셨다. 아마도 할아버지는 겨울 내내 시래기를 드시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무를 캐간 그 다음 날, 할아버지와의 만남이 마지막이 될 줄이야....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나 누구도 자신의 죽음의 때가 언제임을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 그리고 그 죽음이 가까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산다.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 어떻게 아름답게 나이들어가야 하는가를 생각한다. 그리고 조금씩 죽음을 맞이할 마음의 준비를 한다. 영원한 것은 없음을 늘 기억하며, 겸손하고 정직하게 살아야겠다. 그리고 오늘 나에게 주어진 시간에 감사하며, 나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내 주변에 있는 가족과 이웃, 사회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생각하고 실천하며 살기를 소망한다.
할아버지 밭에는 지난 가을에 다 거두지 못한 쪽파가 올라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