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멸보궁에 부처님 사리 없다 (8)

-Episode 7 명나라 황제의 칙서 -

by 뜨레스

-Episode 7 명나라 황제의 칙서-


1407년 5월 18일 (태종실록 13권, 태종 7년 5월 18일)에는 명나라 황제의 칙서가 소개되고 있다.

"사신 황엄과 기원이 받들고 온 사리를 청하는 황제의 칙서"

조정 사신(朝廷使臣) 사례감 태감(司禮監太監) 황엄(黃儼)과 상보사 상보(尙寶司尙寶) 기원(奇原)이 칙서(勅書)를 받들고 왔다. 칙서에 이르기를,

"들으니 왕의 아버지가 전에 사리(舍利)를 가지고 있었는데, 천보산(天寶山) 등치에 있다고 하므로, 지금 태감 황엄 등을 시켜 그것을 맞아오게 하는 바이니, 하나하나 보내 줄 수 있겠는가? 아울러 채단(綵段)(고급비단)으로 왕과 왕비에게 주니 이르거든 영수(領收)하라. 왕과 왕비에게 각각 채단 30 필을 준다."

ChatGPT Image 2025년 10월 2일 오후 04_33_47.png 영락제의 칙서


명나라 황제 영락제는 조선의 태상왕 이성계가 가지고 있던 사리를 왜 하나하나 보내달라고 하는 것일까?

그것도 아들인 태종 이방원에게 칙서를 보내 달랑 비단 30 필을 주면서...


그렇다면 명나라 황제 영락제는 어떤 인물이었는지부터 알아본다.

영락제는 명 태조 주원장의 차남으로 친조카인 건문제로부터 "정난의 변"을 통해 무력으로 왕위를 탈취하고 1402년 즉위한 후 곧바로 사초·실록 등 건문제 흔적을 대대적으로 말살한 인물로, 자신의 왕권의 정통성을 위해서 “황실 차원의 대불사(大佛事) 추진” 하면서 사리탑 봉안을 위해서 막대한 사리가 필요하게 된 것으로 역사는 평가한다.


영락제의 칙서를 받은 태종 이방원의 다음 행보를 보자...,


임금이 칙사(勅賜)를 받은 뒤에 엄(儼)이 중궁(中宮)에 들어가서 친히 왕비에게 주고 나왔다. 엄(儼) 등이 또 칙서를 싸 가지고 덕수궁(德壽宮)에 가니, 태상왕(太上王)이 병(病)이 있어 출영(出迎) 하지 못한다고 사양하였다. 엄(儼)이 말하기를, "황제께서 주시는 것은 전내(殿內)에서 받을 수 없으니, 마땅히 백 보(步)밖에 출영(出迎)하여야 합니다." 하였다. 태상왕이 이에 전문(殿門) 밖 백 보쯤 나와서 명령을 맞았다. 칙서의 말[勅辭]은 앞의 것과 같고, 준 채단도 또한 30 필이었다. 엄(儼) 등이 태평관(太平館)으로 돌아가니, 임금이 관(館)에 나가서 잔치를 베풀었다.


태상왕 이성계는 당시 병환 중이었음에도 사신 엄은 황제가 주는 것이니 백보 밖에서 받으라 하니 태상왕 이성계가 그에 따랐다는 기록이다. <주먹이 운다 울어 >

당시 명나라의 병력은 약 200만, 조선의 병력은 약 20만이었고, 명나라의 토지 면적은 약 6,800,000 km, 조선은 약 220,000 km²로 조선보다 30배가 큰 대국이었으니 천하의 이성계라도 따르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짐작은 가지만 병환 중인 노구를 이끌고 전문밖 백보쯤 나와서 칙서를 받았다.

칙서를 받은 이성계는 이틀 후인 1407년 5월 20일 이성계가 보관 중이었던 사리 3백3매를 황엄에게 주었다는 기록을 실록에서 이렇게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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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실록 13권, 태종 7년 5월 20일 계유

태상왕이 사신 황엄에게 간직하던 사리 3백3매를 주다

태상왕(太上王)이 황엄(黃儼)과 기원(奇原)을 청하여 덕수궁에서 잔치하고, 태상왕이 보장(寶藏)해 두었던 사리(舍利) 3백3매(枚)를 내어 황엄에게 주니, 엄이 매우 기뻐하여 머리를 조아려 받고, 단자(段子) 2 필과 마른 오매(烏梅)·얕아요(椰瓢) 등 두어 종류를 드리었다.


태종 이방원은 한술 더 떠서 3백3매를 준 한 달 후인 1407년 6월 6일 이성계가 가지고 있던 사리 3백 개(추가로)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사리 100개 그리고 각 절에서 가져온 사리 4백 개 도합 800개를 은합에 싸서 조선의 사신 이귀령을 통해 보냈다는 기록인데, 명나라 사신 황엄은 태상왕의 사리 303개를 받고 만족한 듯 돌아갔는데 다시 한 달 후 사찰을 뒤져 추가로 사리 800개를 모아서 조선의 사신을 통해 자진 납세했다는 기록은 선뜻 납득하기 어렵다.

이방원도 영락제처럼 왕권의 정통성 부재가 빗어낸 결과가 아닌가 생각한다.

1407년 5월 20일 1차 303매 / 1407년 6월 6일 2차 800매 도합 =1103과의 조선의 사리가 명나라로 보내졌다.

태종실록 13권, 태종 7년 6월 6일

흠차관 황엄과 기원 편에 사리 8백 개를 올리다

황엄과 기원 등이 돌아갔는데, 임금이 이들에게 붙여 황제께 아뢰기를,

"삼가 신(臣)의 아비 신(臣)【휘(諱).】이 옛날에 간직하고 있던 사리(舍利) 3백 개[顆]와 신(臣)이 간직하고 있던 1백 개, 그리고 현재 관원을 보내어 경내(境內)의 여러 산에 있는 각 절[寺]을 두루 돌아다니게 하여 가져온 사리 4백 개, 총계(總計) 8백 개를 도금(鍍金)한 은합(銀盒)과 내 옥합(內玉盒)을 갖추고 밖은 은(銀)으로 싼 소함(小函)을 써서 담고, 소금황라복(銷金黃羅袱)과 채단(綵段)으로 만든 수(繡) 놓은 겹보(裌袱)로 싸서 배신(陪臣) 이귀령(李貴齡)을 보내어 받들고 가게 하였으되, 흠차관(欽差官)과 함께 가서 봉진(奉進)케 합니다.


그로부터 12년이 지난 1419년 9월 8일 세종 즉위 1년 명나라 사신 황엄이 이명덕 등과 흥천사에 가서 부처 뼈와 사리를 내어 태평관으로 가다 이명덕·원숙·원민생등이 황엄을 좇아 흥천사에 가서 부처에게 공양을 올리고 승려에게 시주하고, 석탑을 열고 석가여래의 정수리 뼈와 사리 4개를 내어서 태평관으로 받들고 돌아갔다.


그로부터 다시 10일 후 - 1419년 9월 18일

"영락(永樂) 17년 8월 17일 흠차 내관(欽差內官)인 사례감 태감(司禮監太監) 황엄이 이 나라에 와서 성지를 전했는데, 이르기를, ‘조선국의 석탑과 사탑(寺塔) 속의 사리는 그 수효가 몇 게임을 묻지 말고 〈얼마가 되든지〉 다 보낼지어다. 그리고 다른 절 안에 있는 사리도 보낼지어다.’ 하여, 이 뜻을 받들어 신의 아비와 신은, 선조 강헌왕(康獻王)이 공양하고 가지고 있던 석가의 사리와 정골(頂骨) 및 국내에 두루 다니며 받아 가지고 온 제불여래·보살(諸佛如來菩薩)과 명승(名僧)의 사리를, 배신(陪臣) 좌군 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 원민생을 시켜 받들어 가지고 흠차관과 함께 가서 진상하게 하였으니, 사리의 수효는 총 5백58개의 존귀한 알이오."라고 하였다.


이렇게 조선에서 봉안 중이던 사리를 전부 찾아내 명나라로 보낸 조선왕조실록 기록을 정리해 보면,

1차 1407년 5월 20일 303매

2차 1407년 6월 6일 800매

3차 1419년 9월 8일 4매

4차 1419년 9월 18일 558매

도합 1,665과


몇 개인지 묻지 말고 얼마가 되든지 다 보낼지어다. 그리고 다른 절 안에 있는 사리도 보낼지어다. “

그렇게 조선에 보관 중이던 부처님 사리든 고승들의 사리든 남아 있는 사리 전부인 1,665개를 영락제에게 받쳤다. 그런데 위 실록에서는 석가의 사리와 정골(이마뼈)이라고 표현하는 단어가 보인다.

앞서 부처의 다비식에서 부처의 정골이 나왔다는 말은 없었는데 세종실록에서 처음 부처의 정골을 이야기하고 있다. 부처의 다비식 후 부처의 정골이 수습되었다면 굳이 사리함과 사리탑을 사리에 포함시켜 10과라고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시 조선은 유교 국가였기 때문에 사리의 중요성을 크게 내세우지 않았고, 영락제의 강력한 요구 앞에서 거절하기 어려웠던 이유로 조선의 사리란 사리는 대부분 명으로 보내게 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나 그래도 사리 역시 국가유산인데 조선에 사찰전부를 뒤져서 보냈다는 것이 못내 아쉽고 아프다. 이 부분에서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명나라 황제 영락제는 조선 어디에 사리가 얼마나 있는지를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Episode 9에서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