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시간

by 동글이

만국기가 펄럭이는 운동장에서 뽀얀 흙먼지를 배경으로 한 운동회, 추운 겨울 길거리에 드럼통 고구마 장사, 커다란 잠자리 안경에 칼단발 머리 여고생들. 어떤 알고리즘이 이끌었는지 모르겠지만 가끔씩 소셜미디어에 몇십년 전 장면들을 보며 예전이 좋았는데 되뇌이며 추억에 잠기곤 한다.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네모난 마당이 있는 한옥집에서 산 적이 있었다. 마당에는 아빠가 만드신 커다란 평상이 있어서 여름에는 거기 앉아서 수박도 먹고 누워있기도 하고, 놀기도 했다. 엄마는 그때 부업으로 밤을 깎는 일을 했는데, 반장이라고 불리는 아주머니 집에서 생밤을 몇자루씩 받아와서 마루에서 밤을 깎으셨다. 목장갑을 끼고, 끝이 뭉툭하고 짧지만 아주 날이 선 밤 깍기 전용 칼을 쥐고는 일정한 방향과 순서로 밤을 깎으셨다. 엄마가 밤을 깎는 모습을 구경하는 건 재미있었다. 가장 바깥쪽 단단한 갈색 껍질을 까는 건 재미있는 파트는 아니었다. 단단한 껍질을 벗기면 나오는 투실투실한 껍데기를 깎을 때가 정말 흥미로웠다. 밤의 뾰족한 머리를 중심으로 양쪽 모서리가 한쪽씩 차례로 둥글게 깎여나갔다. 그리고 납작한 면의 껍질을 한칼에 깔끔하게 잘라내고, 뒷쪽의 둥그스름한 부분을 세번의 칼질로 위에서 아래로 벗겨냈다. 그렇게 깎인 뽀얀 생밤은 엄마의 칼질에 따라 각이 선명하게 살아있었다. 엄마는 가끔 깎은 생밤을 먹으라고 주기도 했는데, 그 시절 외엔 생밤을 먹어본 기억이 없다. 엄마는 깔끔하게 깎긴 했지만 껍질을 너무 두껍게 깎아서 무게가 항상 적게 나간다고 했다. 도톰하게 살이 붙어 있는 껍질을 찾아서 갉아보기도 했다.


마당에 햇살이 내리쬐는 조용한 오후, 밤깎는 소리와 다 깎은 밤을 물이 담긴 빨간 고무통에 던져넣을 때 참방하는 소리, 입안에 스며드는 달고 떫은, 까끄러운 생밤의 맛. 나에게는 평화롭고 그리운 기억이다.


그렇지만 이 기억은 내게만 그리울 뿐, 엄마에게는 정말 싫었던 기억일 것이다. 빠듯한 살림에 뭐라도 해서 보태야 했고 학교도 오래 다니지 않았고 평생 가정주부였던 엄마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런 부업들 뿐이었을 터.


그러고보니 내가 그리워하는 어린 시절의 추억들은 엄마, 아빠의 고단함과 수고로움이 항상 함께 한다. 나에게는 그리운 추억이, 엄마 아빠에게는 고된 노동으로 기억되는 시절이었던 것이다.


문득 우리 아이는 어린 시절 어떤 장면을 그리워할지 궁금해진다. 우리 아이의 추억은 나도 편안하고 행복했던 기억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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