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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윤서 May 08. 2024

닫힌 아가미로 호흡하기

   그다지 최선이랄 게 없이 살아왔다. 늘 대충 산 것은 아닐 테지만 그 단어 앞에서는 매번 작아진다. 완벽주의 성향을 가진 사람에게 노오력은 있지만 최선 같은 건 없으니까. "최선을 다했으면 됐어."라는 말은 그래서 늘 쓰다. 그런 건 도달해 본 적도 없었기에. 


   그렇지만 내게도 최선을 다한 일이 딱 한 가지 있다. 

   최선을 다해 호흡하기. 5년째 지켜오고 있는 것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숨이 안 쉬어지기 시작했다. 초반엔 쉬어지지 않는다 보다는 조금 가쁘다는 느낌이었다. 습식 사우나에서 30분 정도 버티다 보면 훅 올라오는 탁탁 막히는 호흡과 비슷했다. 피곤하다고 생각했다. 수험생이니까. 와중에 중국 학교 기숙사 안에서 동생들 챙기랴, 여기저기 불러 다니랴 정신이 없었으니까. 그럴 땐 가끔 바람을 쐬고 돌아왔다.


   그러다 아무리 바람을 쐬고 돌아와도 호흡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는 횟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누가 심장을 꽈배기처럼 비틀고 잡아당기는 것 같은 옥죔에 바닥에 주저앉기도 했다. 어느 날엔 혈액순환이 되지 않아 손과 발이 오그라들었다. 사지가 굳어 저절로 꽉 쥐어진 손을 보면서 울음이 나는 날이 많아졌다. 


   급하게 한국으로 돌아와 받은 진단명은 공황장애였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회복 기점이 불명확한 병이었다. 미지근하게 암담한 기분이었다. 멍하고도 어지럽게 병원 슬라이딩 도어 문을 열었다.


   숨이 쉬어지지 않을 때마다 익사하는 기분을 느꼈다. 아가미 없는 인어처럼 여길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인데 해결구는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 계속됐다. 아픈 얘기만 하면 줄곧 울곤 하는 엄마에게도, 아플 때마다 기숙사 깊숙한 곳에 몸을 숨기는 날 매번 찾으러 다니는 친구 R에게도. 아프고 나니 세상에 죄송해야 할 일이 천지였다. 수치스러워서 그랬던 것도 같다. 상해에서 학교 행사를 마치고 하얼빈으로 돌아가려던 길, 사지가 마비되어 중식당 의자 여러 개를 붙여놓고 꼿꼿하게 누워있을 땐 살아있음을 미안해하기도 했다. 원인 불명의 병으로 주변 사람들까지 힘들어지니 결국 이 몸을 갖고 사는 내가 원인 제공자인 것 같아서.


   지극히도 당연한 것을 못하게 되었을 때, 들숨 날숨을 자주 반납할 수밖에 없게 되었을 때, 성실하게 삶을 놓고 싶다고 생각했다. 진짜 그러기를 다짐한 것은 아니었지만 차라리 이러다가 편안하게 숨을 멈추고 싶었다. 무(無)의 상태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 간절하게 호흡하고 싶었던 건 그때쯤부터였다.


   높은 기대치를 가지고 늘 기대 이하의 삶을 살아왔지만 숨 쉬는 것, 그것 하나만큼은 최선을 다하기 시작했다. 간절히 살고 싶어졌다. 더 이상 꺽꺽거리며 호흡을 달래는 일은 없고 싶었다. 오그라드는 나의 마디들을 바라보면서 상대에게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고 싶었다.

   최선의 삶은 최악의 삶으로부터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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