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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윤서 Feb 21. 2023

오늘의 폴폴 날아간 기억은 어디를 향해 가는지

어릴 때부터 내 방은 항상 난잡했다. 엄마가 폭풍 잔소리를 들으며 치운 방이 아무리 노력해도 3일을 채 못 갔으니 말 다했다. 앉아서 공부하고 낙서를 하던 용도의 책상은 작은 창고로 용도를 상실했고, 바닥은 남은 자리가 내가 걸어 다니는 징검다리였다. 잠을 청하는, 어쩌면 가장 깨끗할 법도 한 침대는 괜찮았냐고 물으면 그것도 아니었다. 두 팔을 벌려야 옮길 수 있는 옷가지들 한 움큼은 생활할 땐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다가 내가 잘 때쯤이면 바닥에 고이 모셔져 있었다. 덕분에 내 방의 대청소 주기는 일주일 간격으로 찾아온다. 일주일간의 허물들과 생활의 흔적들을 원상 복귀하는 날이 하루쯤은 있어야 했다. 더러운 인간에게도 작심삼일을 시작하는 월요일은 필요하니까 말이다. (물론 그 작심'삼일'은 매주 어김없이 다시 찾아온다.)


대청소를 하는 동안은 평소보다 더 굼떴다. 매사 빠릿빠릿한 엄마가 깊은 참을성을 잃는 시간. 그 이유는 여과 없이 '추억팔이 시간'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온갖 물건이 쌓인 방 한가운데서 서랍 구석에서 나온 노트를 읽기 시작한다던지, 존재조차 잊었던 예쁜 편지지에 어울리는 사람에게 감성에 젖은 편지를 쓴다던지 하는 행위들은 일주일마다 나타났다. 어느 날은 중학교 시절 짝사랑하던 애의 이야기가 담긴 일기였다가 또 다른 날은 유학시절 찍어모았던 사진첩이 튀어나왔다. 그렇게 불쑥 어딘가에서 나타난 옛 기록들은 귀찮은 대청소에 쏠쏠한 즐거움을 줬다. 엄마는 왜 청소에 몇 시간씩 걸리나 의문이었겠지만.


그중 가장 재밌는 것들은 꼭 여과 없이 날 적은 기록들이었다. 중학교 초반, 그러니까 욕도 멋의 일부라고 자부했던 시절의 비속어 섞인 그림일기 혹은 1년 다이어리 상반기와 하반기에 짝사랑으로 등장하는 이가 각각 다른 웃픈 유학일기 같은 것들. 혼자 보는 일기에도 꾸며낸 나를 가득 적은 지금과 달리 일기가 유일한 분출거리였던 그 시절의 기록들이 지금은 제일 귀하다. '이렇게 욕을 많이 했었단 말이지 내가?' '그때 이 사람을 좋아하기도 했었나?' 하는 기억 저편에 있는 속이야기까지 죄다 꺼내진 이야기를 하루종일 붙잡다 보면, 어느새 대청소는 뒤로 미뤄지는 경우가 허다했다. 엄마의 숱한 눈치를 받아야 했지만, 그 시간이 그렇게 재미있다. 지난날의 진지하고 슬픈 시간들은 그렇게 대청소의 쏠쏠한 재밋거리로 탈바꿈되었다.


일기에 솔직하고 적나라한 이야기를 적지 않기 시작한 건 손과 주변에 미디어가 쥐어지고 나서부터인 것 같다. 쿠키폰과 노리폰의 시대가 한참 지나고 갤럭시와 아이폰이 대치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나는 여전히 2G 시대를 살고 있었다. '성인이 되기 전까지 스마트폰은 없다'를 완강하게 제창하던 부모님의 교육신념은 내가 휴대폰 사용이 불가한 국제학교에 들어가고 자연스레 실현되었다. 친구가 전부이던 중학생 시절 반항을 목적으로 몰래 친구에게 공기계를 받아 쓴 적은 있지만, 불과 한 달도 안 되어서 빼앗긴 그뿐이었다. 대체 어느 시대를 살고 있는 거냐던 친구들의 물음이 사라진 지는 채 3년도 되지 않았다. 모든 미디어가 차단된 세계에서 우리가 할 수 있던 거라곤 수많은 구전과 서면 기록뿐이었다. 그렇지만 구전은 대부분 구설로 변질됐고, 그건 속 깊은 말들을 털어놓고 싶은 나의 욕망과는 맞지 않았다. 결국 그 시절 우리는 1년 다이어리 정도는 거뜬히 가지는 청소년기를 보냈다. 사람을 믿을 수 없을 때 하는 것, 그게 기록이었다.


얼마 전에는 장롱을 탈탈 털어 정리하다가 불과 작년에 가지고 다니던 다이어리를 발견했다. 또 호기심이 도졌다. 작년에는 뭘 생각하면서 하루를 견디고 보냈을까. 결과적으로는 재미가 없었다. '뭘 하고 뭘 하다가 이걸 한 후에 잠들었다'로 귀결되는 페이지들만 수두룩했다. 수년이 지나고는 이런 형식의 기록도 의미가 있겠지만은 내가 원했던 건 더 솔직한 나와의 대담이었는데. 그런 이야기들은 쏙 빠지고 내가 보기에도 좋은 말들만 남았다. 그 시절의 난 일상의 성숙함을 원했는지도 모르겠다. 그치만 그게 진짜 내 속마음이면 아쉬움도 적었지 않을까. 그때도 지금도 미성숙한 나인데 가장 솔직함을 요하는 가장 사적인 기록에도 멋져 보이는 나만 적어두었다. 미디어가 일상을 침투하면서 그렇게 고민하지 않아도 영상 하나 보면서 쉴 수 있고, 더 그럴듯한 글을 올리며 위안할 수 있어서 그랬던 것일지. 지난 일 년의 흔적에 아쉬움이 남았다.


그러다 오늘은 잊고 있었던 노트를 또 하나 찾았다. 방이 거실만한 것도 아니고 뭘 이렇게 자주 발견하는지. 잊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스타일에 딱 맞는 스티커를 붙이고 자랑했던 다이어리는 이미 사람들에게 나의 일기임이 밝혀졌고, 언제 나도 모르게 읽힘 당할지 모르니 진짜 솔직한 마음, 심지어 일정 수준의 욕조차 허용가능한 노트를 따로 쓰자고 했었다. 그렇게 처음부터 다시 읽은 노트를 보면서 '이거지.' 하고 쾌재를 불렀다. 오랜 친구와의 신뢰가 깨지던 순간의 충격과 미래에 대한 불안이 적나라하게 적혀있는 작은 노트에 수많은 기억을 되얻었다. 하루의 나열보다 작은 사건의 긴 감정이 마음에 훨씬 깊게 들어왔던 것.


마음에 치여 일부러 쉽게 휘발하려 했던 수많은 걱정과 고통의 글감을 떠올린다. 지금은 전보다 덜 어수선한 내 방도. 방은 내 마음이기도 했다. 어수선하게 흐트러진 방일수록 그 어수선함조차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가난했다는 뜻이고, 정돈된 방이 꽤 오래 유지될수록 그만한 마음의 힘이 남아있단 뜻이었다. 결국 내게 대청소의 의미는 더럽거나 어지러운 것을 쓸고 닦아 깨끗하게 한다는 사전적 의미보다 널브러진 마음을 이젠 괜찮아진 지난 과거로 희석시키는 감정적 의미가 더 강하다.


요즘은 방이 꽤 오랫동안 깔끔하다. 마음이 다듬어져서가 아니라 속으로 태우는 방식을 택했기에. 그렇게 다시 응축해서 폴폴 날리는 기억은 후에 또다시 아쉬운 기록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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