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중산층의 교육
치앙마이에서 맞이한 첫 새해 전야,
TV를 켰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태국 지상파 방송국의 새해 카운트다운 생중계였는데, 무대 위 태국인 MC 두 명의 진행 방식이 무척 생경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태국어 멘트가 끝나면 바로 유창한 영어로 이어 말했다. 두 언어가 쉼 없이 교차하며 무대를 이끌었다. 자막이 아닌 육성으로, 태국어와 영어를 섞어 진행하는 모습은 흡사 글로벌 음악 시상식인 ‘마마(MAMA)’의 한 장면 같았다.
"엥? 뭐지?"
자국민을 위한 축제 한복판에서 영어가 모국어와 대등한 주인공 대접을 받는 풍경은 낯설었다.
외국인 관광객을 위한 방송국의 배려였을까?
그러나 이런 생경한 풍경은 일상에서도 곧잘 마주치게 되었다. 아이의 학교 등하교 시간에 마주치는 태국인 학부모들은 외국인 학부모들과 자연스럽게 영어로 이야기를 나눈다. 국제학교라는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학생뿐만 아니라 부모들도 영어를 구사한다는 점이 신기했다.
백화점 내 서점이나 키즈카페에서 아이들이 모여 영어로 재잘거리는 모습은 이미 흔한 광경이다. 태국의 공교육 과정에서의 영어 수업 비중과 낮은 성인 영어 구사율을 떠올려 보면 이는 지독한 모순이다.
도대체 태국의 중산층은 어떻게 영어라는 편리한 도구를 장착하게 된 것일까?
이들의 유창한 영어 뒤에는 치밀한 교육 전략이 숨어 있다. 태국 중산층의 교육은 전통적 인맥을 다지는 ‘명문 사립’과 글로벌 네트워크를 지향하는 ‘국제학교’로 나뉜다. 특히 글로벌 경쟁력을 중시하는 신흥 세력일수록, 자녀가 말을 배우기 시작하는 어린 시절부터 연간 학비가 수천만 원에 달하는 국제학교의 커리큘럼 속에 자녀를 편입시킨다.
이곳에서 아이들은 태국 땅에 발을 딛고 살지만, 사고의 체계와 소통의 도구는 철저히 서구식 시스템에 맞춰진다. 본국으로 돌아갈 외국인 친구들과 섞이며 쌓는 인맥은, 이들에게 '태국인'을 넘어 '글로벌 엘리트'라는 새로운 계급장을 달아준다.
결국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한다는 것은 단순한 어학 능력을 넘어, 그들만의 리그에 진입했음을 나타내는 ‘보이지 않는 증명서’가 된다.
전편에서 다룬 화려한 수입차가 눈에 보이는 명함이라면, 유창한 영어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계층의 필터다. 국제학교에서 형성된 그들만의 네트워크는 대학과 사회 진출까지 이어진다. 대물림된 자본 위에 덧입혀진 유창한 영어는, 태국 사회의 계층의 벽을 더욱 견고하게 만든다.
이 구조는 대한민국과 비교할 때 더욱 분명해진다. 한국에서도 영어는 분명 중요한 자원이다. 국제학교와 유학, 명문 사립학교 역시 존재하며, 경제적 여유가 있는 가정일수록 이러한 교육 방식을 선호하는 경향도 분명하다. 다만 그 비중과 영향력은 다르다.
한국에서는 여전히 대다수의 학생이 같은 입시 제도 안에 놓여 있고, 그 안에서 영어는 경쟁 과목 중 하나로 작동한다. 한국의 교육이 같은 운동장 안에서 치르는 ‘선행 속도전’이라면, 태국은 더 좋은 운동장으로 옮겨가 다른 집단과 분리하는 ‘성벽 쌓기’에 가깝다. 한국의 중산층은 대치동에서 속도를 높이고, 이곳의 중산층은 국제학교로 트랙을 바꾼다.
카운트다운 방송에서 들려오던 유창한 영어는 단순한 진행 문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누군가에게는 일상이고, 누군가에게는 접근이 차단된 ‘다른 세계의 암호’였다.
나에겐 그저 여행을 위한 도구였던 영어가, 이곳에서는 계층을 가르는 성벽에 더 가깝게 보인다. 같은 땅을 밟고 서 있지만, 사용하는 언어에 따라 서로 다른 층위의 세상을 살아간는 것이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