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 새벽 공항으로 가는 길
“일어나.”
아내의 나직한 목소리에 감겼던 눈이 번쩍 뜨였다. 머리맡의 핸드폰은 새벽 네 시임을 알리며 ‘징징’ 진동을 울려대고 있었다. 10분만 더 단잠을 청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나,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는 비행기 시간을 떠올리며 무거운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작년에는 새벽 비행기라 10만 원 남짓한 비용을 들여 콜밴을 이용했었다. 하지만 올해는 비행시간도 조금 늦춰졌고, 무엇보다 아이들이 부쩍 자란 덕분에 지하철을 이용해도 될 것 같았다. 부모님 출석하시는 교회에 주차를 마친 뒤 첫차에 탑승했다. 이른 새벽임에도 객차 안은 빈자리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활기로 가득했다. ‘커다란 짐과 아이들을 데리고 출근길 인파 속에서 민폐가 되진 않을까’ 했던 염려와 달리, 공항까지의 여정은 생각보다 순탄했다.
개찰구를 빠져나오자마자 뜻밖의 행운이 찾아왔다. 노약자와 어린이, 임산부 등 교통약자를 위한 공항 내 전동카트 기사님이 멀리서 우리를 향해 손짓을 하신 것이다. 한 번도 이용해 본 적 없기에 ‘설마 우리인가?’ 싶어 나를 가리키자, 기사님은 인자하게 고개를 끄덕이셨다. 내 곁에 선 아이들을 배려해 주신 모양이었다.
캐리어를 짐칸에 싣고 나니 문득 한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느그 아빠 어디 가셨냐?”, “아버님은 어디 가셨어? 할아버지는?” 온 가족이 사방을 두리번거렸지만, 아빠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아마 먼저 가셨을 거예요. 아니면 전화하시겠지, 일단 출발해요!”라며 짐짓 쿨하게 대답했다.
다른 사람과의 특별함 때문이었을까? 특별함 없는 카트를 타고 가족은 설렘과 신이 난 기색이 가득했다. 카트가 매끄럽게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아빠의 뒷모습이 보였다. 우리는 반갑게 손을 흔들며 아빠를 지나쳤다.
“사람이 많은데 운전을 정말 부드럽게 잘하시네요.” 엄마는 상대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다정한 인사를 잘하신다. 기사님은 “이 길만 6년을 운전했는걸요.”라며 자부심 섞인 답변으로 화답하셨다.
수하물을 부치기 위해 체크인 카운터에서 한참을 기다려도 아빠는 나타나지 않으셨다. 걱정이 된 엄마가 “느그 아빠는 어디 갔다냐?” 결국 전화를 거셨다. “어디요? D라니까! B 말고, ABCD 할 때 그 D! DDDD!” 엄마의 목소리에는 여행의 시작을 알리는 들뜬 기색과 특유의 과장된 활기가 섞여 있었다. 마침내 우리 일행을 찾지 못해 헤매던 아빠와 연락이 닿았다. 내가 손을 번쩍 들자, 멀리서도 금방 알아채신 듯했다. 키가 커서 좋은 점이란 위치를 빨리 파악 당한다는 것과 높은 곳의 짐을 옮기는 일 정도뿐인 것 같다.
뒤늦게 합류한 아빠는 화장실이 급해 잠시 다녀오셨다며 머쓱하게 해명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빠의 얼굴에는 여행에 대한 기대감과 가족을 다시 만난 안도감 섞인 미소가 가득 번져 있었다.
감기약
“약 좀 먹으라니까!”
“안 먹어도 당된께.”
코감기로 고생하는 아빠께 약을 권하는 엄마의 성화가 집요했다. 마치 내게 도움을 청하듯 다급하게 이어지는 그 목소리에도 아빠는 요지부동이었다. 고집스러운 성격을 잘 아는 나는 그저 침묵을 지킬 뿐이었으나, 끊이지 않는 실랑이에 결국 아빠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 같은 분위기가 견디기 힘들었다.
“아니, 약을 왜 샀어요? 안 드신다고 하면 그냥 사지 마세요. 싫다는데 계속 강요하시면 서로 기분만 상하잖아요. 제발 그냥 좀 두세요!” 이번 여행만큼은 절대 짜증 내지 않겠노라 수없이 다짐했건만, 기어코 약봉지를 사 들고 오시는 엄마를 보자 참았던 화가 일순간 치밀었다. 결국 나는 소리를 지르며 엄마의 손에서 약을 뺏듯 낚아채 버렸다. 내 서슬 퍼런 일갈에 아내는 “여보, 그러지 마.”라며 내 팔을 잡았고, 엄마는 무안한 듯 “여행 처음부터 기분 안 좋게 갈래.”라며 나를 나직이 타이르셨다.
무거운 침묵을 뒤로하고 입국장으로 향했다. 빨리 분위기를 풀고 싶었지만 특별한 방법도 생각나지 않았다. 못내 죄송한 마음이 가슴 한구석에 가득 찼지만, 살가운 말 한마디 건네기엔 부모라는 존재가 내게 너무도 편안하고도 어려운 법이었다. 분위기를 전환해 보고자 짐짓 무심하게 말을 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