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국 심사와 아침 식사
“물은 반입 안 되는 거 아시죠?”
“오메 물 가져왔는디, 아까워서 어찐다냐 빨리 한 모금씩 해라.” 엄마는 큰일이라도 난 듯 말씀하셨다.
그냥 버리시라고 말씀드렸지만 “아까워서 그라지야. 그럼 토마토즙도 안 된다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씀하셨다. 액체류는 절대 안 된다는 단호한 대답에 엄마는 발을 동동 구르셨다. “오메오메 어쩐다냐. 빨리 두 개씩 먹어브러야~” 출국 전 김밥과 곁들이려 인원수대로 챙겨오신 정성이 못내 아까우셨던 모양이다.
“아이고 왜 가져와서는 그냥 사 먹으면 되지.” 입으로는 투덜거렸지만, 나는 토마토즙 하나를 건네받아 벌컥벌컥 들이켰다. 아이들에게도 하나씩 마시라고 했고 남은 것들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차가운 즙이 목을 타고 넘어가자 가슴 속에 맺혀 있던 응어리진 감정도 조금은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다행히 입국 심사장은 우려와 달리 한산했다. 작년의 인파를 기억하며 서둘러 출발한 덕분에 두 시간 남짓한 여유가 생겼다. 잠을 10분만 더 잤더라면 좋았을 텐데 싶다가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출근 시간대 지하철 인파에 시달리는 것보다 훨씬 나은 선택이었으며, 시간에 쫓겨 초조해하는 것보다 이 편이 훨씬 평온했으니까.
대기석에 자리 잡으니 엄마가 직접 싸 오신 삼각김밥을 꺼내셨다. 건강을 생각한 담백한 맛이었으나, 입안에서 조금 퍽퍽하게 느껴졌다.
“여기에 참치마요나 제육볶음 같은 걸 넣었으면 더 맛있었을 텐데.” 나도 모르게 또 퉁명스러운 소리를 하며 두 개나 먹었다. 그러자 아내가 얼른 곁에서 거들었다.
“에이 뭘 그래? 맛있기만 하구만, 어머니 맛있어요. 입맛 까다로워선...” 아내는 남편의 말실수를 부지런히 수습하며 엄마의 섭섭한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다. 엄마의 정성과 나의 서툰 표현, 그리고 그 사이를 메우는 아내의 온기 속에서 우리의 여행은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비행기 기내 서비스
기내 좌석에 자리를 앉는 순간 팽팽했던 긴장이 풀린 탓인지, 묵직한 수마(睡魔)가 해일처럼 덮쳐왔다. 3-3-3 좌석 배열의 중심에서 양옆에 아이들을 끼고 앉은 나는, 마치 최후통첩이라도 하듯 아이들에게 속삭였다. “아빠 너무 졸리니까 절대 깨우지 마.” 엄포를 놓듯 한마디를 남기고는 이내 깊은 잠의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다행히 좌석 앞 모니터 속 영화와 게임이 아이들의 주의를 붙들어준 덕분에 한동안은 고요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아빠, 아빠!” 얼마나 잤을까, 예준이의 다급한 목소리에 번쩍 눈이 떠졌다. 앞줄에서는 승무원이 음료 카트를 밀며 다가오고 있었다. 기내 서비스 앞에서 아이들은 설렘보다 당혹감이 앞섰던 모양이다. “이거 공짜야?” 저가 항공에 익숙해진 탓인지, 모든 서비스에 의구심을 갖는 아이들의 물음이 귀여우면서도 짠했다. 무엇을 어떻게 주문해야 할지 몰라 발을 동동 구르던 아이들이 나를 흔들어 깨웠다. “콜라 마셔도 돼?” “음, 콜라 말고 오렌지, 토마토, 구아바 주스나 우유 같은 게 있네.” 내 말에 예준이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예온이에게 의사를 물었다. “예온이는 뭐 마실래?” “난 콜라!” 내 제안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혹은 확고한 주관으로 콜라를 고집하는 막내의 대답에 실소가 터져 나왔다. 첫째에게 탄산을 제한했던 터라 형평성을 고려해 ‘사이다’를 제안하며 영어 표현을 일러주었다. “사이다는 영어로도 그냥 사이다라고 하면 될 거야.”
잠시 후, 곁에서 “사이다, 플리즈(Cider, please)”를 연신 되풀이하는 예준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승무원의 표정은 의아함으로 가득했다. 아차, 외국 항공사에서 ‘사이다’는 통용되지 않는 단어임을 깜빡한 것이다. 결국 세븐업(7-Up)을 받아 든 뒤에야 상황은 일단락되었다.
당혹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내가 주문한 ‘오렌지 주스’는 승무원의 착오로 ‘화이트 와인’이 되어 돌아왔다. 이 또한 여행의 묘미라 생각하며 가볍게 넘겼지만, 문제는 ‘우유’였다. “밀크(Milk)”라는 간단한 단어조차 소통되지 않아 고개를 갸우뚱하는 승무원 앞에서, 나는 온갖 발음을 굴려 가며 “미이얼ㅋ”를 수차례 반복한 끝에야 간신히 우유 한 잔을 쟁취할 수 있었다. 오랜만의 영어라지만, 이토록 무력하게 자신감을 잃을 줄이야.
기내식이 나오자 아이들의 질문은 도돌이표처럼 되돌아왔다. “아빠, 이것도 공짜야?” 유료 서비스가 당연했던 기억이 아이들의 머릿속에 깊게 각인된 듯했다. “나중에 예준이가 돈 내면 돼!” 농담 섞인 대답으로 아이의 긴장을 풀어주었다.
내가 선택한 김치볶음밥에는 작은 고추장 튜브 하나가 나왔다. “고추장 챙겼냐? 언능 챙겨라~” 베트남 현지에서 떡국과 김치찌개를 끓이시겠다며 고추장, 김치, 심지어 떡까지 바리바리 챙겨오신 엄마가 말씀하셨다. 작년 베트남 여행 당시, 현지에서 고추장을 사서 요리해 드셨던 기억이 무척 좋으셨던 모양이다. 이번엔 정성 가득한 ‘집 고추장’까지 공수해 오셨으면서도, 기내에서 나눠주는 작은 고추장 하나까지 알뜰하게 챙기라는 엄마의 말씀에 그저 빙그레 웃음이 났다.
다섯 시간의 비행은 예상보다 평온하게 흘렀다. 모니터 속 세상에 몰입하거나, 스스로 약속한 대로 여행기를 쓰는 데 열중하는 아이들 덕분에 아빠를 찾는 빈도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이 정도의 의젓함이라면 유럽행 장거리 비행도 거뜬하겠다는 오만한 자신감마저 생겼다.
문득 옆자리를 보니, 비행기가 추락할지도 모른다며 이륙 전부터 안전벨트를 힘껏 조이고 잔뜩 긴장해 있던 둘째가 보였다. 어느새 비즈니스석이라도 점유한 듯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자세로 음악을 감상하고 있는 게 아닌가. “추락하면 벨트 매고 있어도 소용없어.” 나의 지극히 ‘T(이성적)’적인 답변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아이는 내 어깨에 기대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나는 새근거리는 아이의 몸 위로 조심스레 손을 올렸다. 비행기는 어느덧 구름 위를 미끄러지며 베트남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