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국 이틀 전
출국을 불과 이틀 앞둔 시점, 한 일은 항공권과 숙소 예약이 전부였다. 어디를 둘러볼지, 어떻게 이동할지는 커녕 기본적인 환전조차 못한 상태였다. 평소 철저한 계획을 중시하던 내가 여행 직전까지 낙관하며 손을 놓고 있었다니, 스스로도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아이들이 부모님 댁에서 잠을 자는 건 흔한 일이다. 아내와 거실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준비된 것 없는 공백이 가시화되자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조급해졌다. 평온하게 앉아 있는 아내의 모습에 결국 날 선 질문을 시작했다.
“준비는 도대체 언제 할 거야?”
“내일 할 거야.” 아내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당당하게 대답했다.
그 모습에 내 목소리는 한층 더 공격적으로 변했다.
“내일 병원도 가야 하고 결혼식도 있잖아. 다녀오면 시간이 촉박할 텐데 언제 다 하려고 그래? 그러다 빠뜨리는 게 생기면 어쩌려고?”
“다 생각하고 있어.” 돌아오는 대답은 퉁명스러웠다.
이번 일정 중 '푸꾸옥'은 처음이라 동선을 짜는 일이 유독 어려웠다. 인터넷 정보가 머릿속에 정리되지 않으니 답답함만 가중되었다. 그 와중에 무언가에 열중하며 휴대폰만 들여다보는 아내가 야속하게 느껴졌다.
“가서 뭐 먹을지는 좀 알아봤어?” 직업병일까. 나는 아내의 준비 안 된 허점을 정확히 짚어내며 재차 압박했다.
“알아볼게.” 아내는 조심스럽게 대답했지만, 이미 내 분노 감정의 온도를 올리기 위해 스스로 채찍질하는 것 같기도 했다. 점점 임계점을 넘어서고 있었다.
“아, 몰라. 자기가 알아서 해. 난 모르겠어.” 냉정하게 말을 내뱉고는 귀에 이어폰을 꽂았다. 아내는 묵묵히 방으로 들어가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한참 뒤, 방 안에서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기 수영복이 다 낡았네. 새로 산다는 걸 깜빡했다.” 그 말에 화가 절정에 달했다.
“거봐! 미리 확인했으면 더 알아보고 좋은 걸로 골랐을 텐데, 또 이렇게 급하게 사느라 선택지가 없잖아!” 그렇게 쏘아붙이고는 다시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옆에서 아내는 내 래쉬가드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못미더운 마음에 결국 내가 빠르게 골라서 결제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다 혼똔섬 워터파크에서는 지퍼형 래쉬가드 착용이 안 된다는 문구를 발견했다.
“이 사실, 알고 있었어?”
“응, 찾아보니까 기구 탈 때 손을 가슴 쪽으로 모으면 돼서 지퍼형도 괜찮대.”
나는 지지 않고 다시 몰아세웠다. “그럼 내가 본 정보는 뭔데? 안 된다는 후기가 다섯 개나 있어. 제대로 확인한 거 맞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미안해.” 아내의 힘없는 사과에 기세등등하던 마음이 한순간에 약해졌다. 즐겁자고 떠나는 여행인데, 무엇이 그리 중요하다고 시작도 전부터 이토록 분위기를 망치고 있는 걸까. 짜증을 묵묵히 받아내 준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생겼다.
어느덧 계획의 큰 줄기가 잡히자 마음에도 다시 여유가 생겨났다. “그럼 이 래쉬가드 디자인은 어때?” 아내가 물었다.
나는 화면을 보지도 않고 단호하게 답했다. “싫어, 다른 걸로 골라.”
“보지도 않고 어떻게 싫다고 해?” 아내가 당황스러운 듯 물었다. “자기 말투만 들어도 마음에 드는지 아닌지 알 수 있거든. 그 디자인 마음에 들어?”
“...조금 별로이긴 해.” 아내가 쭈뼛거렸다.
“난 자기의 말투와 억양에서 좋고 싫음이 다 느껴져. 내가 워낙 예민하잖아.” 가벼운 농담과 함께 싱긋 웃어 보이자, 가라앉아 있던 아내의 온기가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우리는 다시 즐거운 마음으로 여행 가방을 채워 나갔다.
아이들과 함께 책을 쓰기로 하다.
여행의 설렘은 아이들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진 듯했다. 벌써 짐을 싸겠다며 소란스럽다. 어떤 가방을 챙길지, 무엇을 담을지를 두고 두 형제의 열띤 토론이 이어진다.
“얘들아, 짐은 내일 챙겨도 충분해.”
“빨리 준비해야 해요. 장난감, 큐브, A4 용지도 가져갈 거예요!”
“안 돼. 장난감은 짐만 될 뿐이야. 이번에는 현지의 문화를 온전히 즐기고 느껴보자. 한국에서 놀던 것을 그대로 가져가면 여행의 의미가 퇴색될 것 같은데?”
방 안에서 아이들이 “가져가고 싶은데...”라며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얘들아, 이리 와보렴. 이번 여행에서는 우리 각자 책 한 권씩 써보는 게 어떨까?” 아이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의아한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작년에 아빠가 여행 다녀와서 책 쓴 거 기억나지? 이번엔 너희의 여행 기록과 느낀 점을 담아보자. 아빠가 도와줄게. 멋진 책이 완성되면 정말 뿌듯하지 않겠어?” 자신만의 책을 가질 수 있다는 말에 귀가 솔깃한 느낌이었다.
“예준이는 글로 적고 중간중간 사진을 넣자. 예온이는 그림을 그리고 그 옆에 짧은 글을 덧붙여보는 거야 어때?”
“좋아요! 해볼래요!” 아이들의 의지가 뜨겁게 타올랐다. “그럼 여행 전의 설렘부터 써보는 걸로 시작해 보자.” 내 말에 예준이가 얼른 노트를 가져왔다.
“처음부터 긴 글을 쓰긴 어려우니, 지금 떠오르는 단어를 먼저 적어봐. 그리고 스스로에게 ‘왜?’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 대답을 아래에 써 내려가는 거야.”
내 설명을 경청하던 예준이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뗐다.
“지금은 ‘기쁨’과 ‘설렘’이에요.”
“좋아! 그럼 왜 기쁜지 그 이유를 써볼까?”
“음... 수영하는 게 좋아서요.”
“베트남에서 수영하는 건 왜 더 좋은데?”
“무이네 수영장은 풍경이 맑고 평온해서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거든요.”
“왜 풍경이 맑으면 마음이 평온해질까?”
“서울은 건물도 차도 많아서 시끄럽고 마음이 꽉 막힌 것 같은데, 베트남은 도서관처럼 고요하고 가을바람을 맞는 것처럼 시원하니까요.”
자신의 생각을 문장으로 만들며 예준이의 얼굴에 자신감이 차오르는 것 같았다. “어렵지 않지? 이런 식으로 쓰면 50쪽도 넘게 쓸 수 있겠는걸? 정말 기대된다!” 나는 두 아이가 듣도록 아내에게 말했다. “예준이는 깊이 있는 글이, 예온이는 예쁜 그림책이 나올 것 같아 정말 기대되는데?”
아이들의 마음속에 ‘작가’라는 꿈과 희망의 씨앗을 심어 주었다. 여행 내내 이어질 이 장기 프로젝트가 쉽지는 않겠지만, 아이들의 시선으로 담아낼 베트남의 풍경이 벌써부터 기다려지고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