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이네에서 호치민 도착
가족과 떠난 느린 시간들(15화)
호치민에 가까워질수록 도로 위 차량은 점점 많아졌고, 교통 체증은 더욱 심해졌다. 기사님께 호치민으로 가는 길에 ATM이 있는 은행에 들러달라고 부탁했지만, 도로가 너무 혼잡해 잠시라도 정차할 수 없었다.
숙소는 1군 한가운데에 잡았기에 도심으로 들어설수록 거리는 더욱 복잡해졌다. 나름 계획은 철저했다. 1군 근처에 관광지가 많으니 숙소를 잡고, 도착한 날과 다음 날 빠르게 관광과 쇼핑을 마칠 생각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계획대로 되는 법은 없었다.
심한 교통 체증과 체크인 지연으로 인해 오후 네 시가 되어서야 호텔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우리 가족과 부모님, 삼촌, 이모의 숙소는 다르게 예약할 수밖에 없었는데, 한 호텔에 모든 인원이 묵을 방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도착도 예상보다 늦어졌는데, 이 호텔 저 호텔을 오가며 체크인과 방 배정을 챙기다 보니 얼굴에는 땀이 주르륵 흘렀다. 여행을 시작하기도 전에 피로감이 몰려왔다.
다섯 시에 로비에서 모여 간단한 쇼핑과 저녁 식사를 하기로 했다. 남은 시간 동안 짐을 정리하고, ATM을 찾아 돈을 인출할 계획이었다. 호텔에서 짐을 풀고 서둘러 나와 가까운 은행에서 돈을 환전했다. 바깥 공기가 무척 더웠고, 급히 다녀온 탓에 몸은 다시금 땀으로 흠뻑 젖었다.
부모님 숙소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가 나에게 다가오셨다. 경연 삼촌과 한바탕 다투셨다는 이야기였다. 들어보니, 아버지가 삼촌에게 같은 방을 쓰자고 했는데 삼촌은 바닥에서 자겠다고 누워버렸다고 한다. 더운 날씨 속에서 그런 이야기를 듣자 짜증이 올라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의 이야기를 잘 들어드리고 이해했으면 됐을 텐데, 왜 퉁명스럽게 대답했을까 후회가 된다.
삼촌은 60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고집이 세고, 때로는 어린아이처럼 행동하곤 했다. 그런 모습에 아버지도 화가 나셨고, 결국 언성이 높아졌다. 호텔에는 트윈 침대가 없어 한 침대를 함께 써야 했는데, 그 점이 답답하게 느껴지셨나 보다. 여행을 계획대로 순조롭게 진행하고 싶었건만, 예상치 못한 갈등이 자꾸 생겨 마음이 불편했다.
나는 삼촌께 직접 말씀드릴 수 없었고, 결국 아버지가 먼저 사과하며 상황을 정리하셨다. 내심 답답했지만, 더는 갈등을 키울 필요가 없었다.
분위기를 다잡고 가족들과 함께 벤탄시장으로 향했다. 각자 100만 동씩 나눠 드리고 자유롭게 쇼핑하도록 했다. 벤탄시장은 가격을 높게 부르는 것으로 유명했기에, 미리 시세를 조사해 가족들에게 문자로 보내드렸다.
“한 시간 후에 이 자리에서 다시 만나요.”
모두들 흩어져 쇼핑을 시작했다. 나는 선글라스를 하나 살 생각이었다. 도수를 넣어야 하니 한국에서 렌즈를 맞출 계획이었고, 여기서는 테만 저렴하게 구입하고 싶었다. 가게 몇 곳을 돌아다니며 가격을 물어보았는데, 예상보다 훨씬 높은 70만 동을 부르는 곳이 많았다. 흥정을 하면 구매 의사를 보이는 것 같아, 일단 여러 곳을 돌아보며 시세를 파악했다.
마음에 드는 선글라스를 발견하고 드디어 흥정을 시작했다. 상인은 70만 동을 불렀지만, 나는 15만 동을 제시하며 “나 매년 베트남에 온다. 작년에도 이 가격에 샀다”라고 덧붙였다. 상인은 물가가 올랐다며 20만 동을 제안했지만, 이 순간 나는 가격 흥정의 주도권이 내게 있음을 직감했다.
“15만 동.”
다시 한번 단호하게 말했다. 상인은 절대 안 된다고 고개를 저었고, 나는 “오케이”라고 말하며 뒤돌아섰다. 몇 걸음 가지 않아 상인은 “오케이! 오케이! 15만 동!”이라며 나를 붙잡았다. 결국 원하는 가격에 선글라스를 손에 넣었고, 흥정에 성공했다는 쾌감의 도파민이 온몸을 휘감았다.
한 시간 후 가족들이 다시 모였을 때, 아무도 쇼핑에 성공하지 못했다고 했다. 벤탄시장 상인들이 나이 많은 한국인들에게는 더 높은 가격을 부르는 것 같았다. 나는 자신 있게 말했다.
“내일 한국 돌아가기 전에 필요한 물건 있으면 제가 흥정해 드릴게요!”
아내가 미리 찾아둔 맛집으로 향했다. 구글 지도에서 높은 평점을 받은 곳이었다. 음식점 내부에는 미국 대통령을 비롯한 유명인들의 방문 사진이 걸려 있었다. ‘이렇게 유명한 곳인데 웨이팅이 없다고?’ 의심이 들었지만, 일단 자리를 잡았다. 음식은 깔끔했지만 기대만큼 특별한 맛은 아니었다. 유명인들이 방문한 가게라고 다 맛있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식사를 마친 후, 베트남에서 유명한 콩카페로 향했다. 여행객이라면 꼭 한 번은 들르는 곳이라 부모님과 삼촌, 이모께 코코넛 커피를 경험하게 해드리고 싶었다.
콩카페는 의외로 현지인들로 붐볐다. 한국의 카페처럼 젊은 베트남인들이 노트북을 펼쳐놓고 일하는 모습도 보였다. 우리는 2층에 자리를 잡고 코코넛 커피를 주문했다. 가족들은 맛에 대한 특별한 감상보다는 ‘이런 곳이 있구나’ 정도로 받아들이는 듯했다.
모두가 긴 이동과 더운 날씨, 벤탄시장에서의 시간을 보내고 지쳐 있었다. 내일 새벽부터 예약된 일정이 있기에 한 시간 정도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호텔로 돌아갔다.
부모님을 호텔에 모셔다 드린 후, 나는 약국을 찾으러 워킹 스트리트 거리를 걸었다. 삼촌과 이모가 선물로 사갈 스트랩실과 SPF 100짜리 선크림을 사야 했기에 빠른 걸음으로 이동했다. 몸은 피곤했지만, 혼자 거리를 걷는 자유로움이 좋았다. 호치민의 밤거리를 천천히 구경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약국에서 필요한 약을 구매한 뒤 호텔로 돌아가는 길, 혹시나 싶어 물건 개수를 세어 보았다. 이상하게도 선크림이 한 개 더 들어 있었다. 의도하지 않은 추가지만, 이미 호텔에 돌아온 후라 되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냥 감사하게 사용하기로 했다.
숙소에 도착했을 때 아이들은 깊이 잠들어 있었다. 예준이 얼굴에 화상약과 상처 연고를 발라주고, 아내의 등에 화상약을 발라주었다. 내일은 구찌 터널을 방문하는 날이다. 정신없이 지나간 하루를 정리하며, 깊은 잠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