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을 떠나는 듯한 느낌
가족과 떠난 느린 시간들(14화)
아침이 밝았다. 무이네에서의 마지막 날이 시작되었다. 짐을 싸야 하고, 정리해야 할 것들이 있지만 마음 한편이 벌써부터 허전하다. 호치민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니, 마치 서울로 돌아가는 느낌이 든다. 이곳에서 느낀 정서적 안정감이 얼마나 컸는지 새삼 실감했다. 하지만 아직 오전이 남아 있다. 마지막까지 이곳을 즐기기로 마음먹었다.
여섯 시 반, 아침 식사를 마친 후 방으로 돌아와 짐을 쌌다. 리조트 냉장고에 남아 있는 음료와 맥주가 아까워 캐리어에 하나씩 넣다 보니 가방이 한층 더 묵직해졌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아쉬움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짐 정리를 마친 후, 남은 시간을 만끽하고자 수영장으로 향했다. 경연 삼촌을 제외한 다른 친척들은 오늘 떠난다는 생각 때문인지 물에 들어가지는 않았다. 대신 비치 베드에 누워 잠을 청하거나, 어제 사 온 망고를 맛보며 여유를 즐겼다. 그런데 정작 망고를 가장 기대했던 경연 삼촌은 한 입도 먹지 않았다. 쫄깃하지 않다며 손사래를 쳤다. 그렇게 망고를 노래 부르더니, 막상 먹지 않는 모습에 헛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엄마, 외숙모, 나, 예온, 그리고 이모는 모여 앉아 망고를 맛있게 나눠 먹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방으로 돌아와 마지막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떠날 시간이 다가올수록 아쉬움이 점점 커졌다. 체크아웃 시간이 12시였기에 최대한 늦게 떠나고 싶어 11시 50분에 로비에서 만나기로 했다.
로비는 체크아웃을 하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우리를 호치민까지 데려갈 차량은 이미 도착해 있었다. 기다리는 동안 짐을 차에 실어 두었는데, 그때 문제가 생겼다. 경연 삼촌과 이모가 함께 사용한 방의 카드키 하나가 사라진 것이다. 주머니를 뒤지고, 방까지 가서 직원이 확인했지만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당황한 우리는 결국 캐리어까지 다시 열어 확인하기로 했다. 한 번 뒤졌던 가방을 또 열고, 옷 주머니를 샅샅이 뒤졌다. 그리고 마침내 바지 안에서 카드키를 발견했다. 긴장이 풀리면서도 땀이 삐질 흘렀다. 카드키가 떠나는 내 마음을 더 잡는 듯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체크아웃을 마치고 차에 올랐다.
나는 차 앞자리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무이네의 풍경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기억하고 싶었다. 하지만 차가 속도를 내면 낼수록 이곳은 점점 멀어져 갔다. 호치민까지는 약 세 시간이 걸릴 예정이었다. 내년에 다시 무이네를 찾을 수 있을까? 확신할 수는 없지만, 또다시 이곳에서 오래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편안하게 쉴 수 있었던 이곳을 떠난다는 사실이 마치 고향을 떠나는 것처럼 아쉽게 느껴졌다. 함께 여행했던 부모님, 이모, 삼촌들도 모두 만족스러워하며 즐거운 여행이었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그 말에 마음이 조금 위로되었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무이네의 풍경을 눈에 담고 있는데, 방해가 되는 일이 생겼다. 갑자기 부장님에게서 문자가 왔다. 내일까지 보고해야 할 업무가 있다는 내용이었다. 마음이 급해졌다. 핸드폰 테더링으로 어렵게 업무 포털에 접속해 재빨리 보고서를 작성하고 결재를 올렸다. 그런데 잠시 후 전화가 걸려왔다. 보고 내용이 잘못되었다는 것이었다. 수문과 문서 내용이 약간 달라 오해의 소지가 있다는 이유였다. 나는 작년과 같은 방식으로 보고를 했지만, 수문 내용을 중시하는 상사의 성향 때문인지 수정을 요청받았다. 중요한 내용도 아니었고, 그냥 넘어가도 될 법한 일이었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짜증이 났다. 물론 절차를 지키는 것이 맞긴 하지만, 지금 내 마음은 무이네와 작별하는 순간을 온전히 누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중간에 휴게소에 들렀다. 다른 가족들은 출출했던지 반미와 햄버거를 시켜 먹었다. 하지만 나는 먹을 겨를이 없었다. 업무를 마무리하느라 정신이 팔려 있었고, 마무리될 때까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배는 고팠지만 우선순위는 업무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어른들의 점심을 챙겨드렸어야 했다. 나 혼자 바쁘다고 신경 쓰지 못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떠올랐다. 배가 고프셨을 텐데, 드시지 않더라도 미리 챙겨드렸어야 했다. 조금 후회가 남는다.
업무는 마무리했지만 이상하게 짜증과 기분 나쁨이 사라지지 않았다. 긴장이 풀리면서 배고픔이 몰려왔고, 그럴수록 감정도 더 안 좋아졌다. 나는 배고픔을 잘 참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배가 고프면 짜증을 내는 단순한 사람이었다. 이성적인 사람이라 생각했지만, 결국 감정에 충실한 사람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렇게 허기와 함께 복잡한 감정을 안고, 호치민을 향해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