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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골 Aug 21. 2024

전투기 조종사였던 커티스 르메이

매몰비용

 나는 살면서 두 번의 고점에 물렸다. 첫번째가 2010년대 중반에 기계공학 유관 학부에 입학한 것이고 두번째가 2022년에 정규직 개발자를 시작한 것이다. 사회에서 기계과 선배들을 만나면 전기차 전환의 피해를 입은 내연기관 외에도 동역학처럼 유망한 연구실들도 녹록치 않은 경제상황이라 한다. 나는 전공 공부를 하는 둥 마는 둥 해서 어차피 탈기계 해야 했지만, "탈기계는 지능순" 자조가 나오기 전에 진작 박종우 교수 말대로 커리큘럼 갈아엎었어야 했는데 그저 착잡하다. 한편 21년 말에 대충 살지 않고 네카라쿠배 대규모 채용전형을 열심히 준비해서 들어갔으면 연봉 테이블이 달랐을 것이다.

 가끔씩 이 생각이 떠오르긴 하지만 현 시점에는 큰 후회를 하지 않는다. 세상에 단기적인 소득 극대화 외에도 얻어야 하는 역량들이 많고, '잘 닦인 길'에 못가고 밀려난 느낌이 들 때 오히려 그 역량들이 눈을 뜨는 경우도 많음을 체감했기 때문이다. 잘 닦인 길만 걸어왔으면 한 치 앞과 몸보신과 타인과의 단기적 비교에 골몰했을 것 같다.


 이런 사정이 있다 보니 커티스 르메이가 전투기 조종사로 육군 장교를 시작한 데 눈길이 갔다. "조종사를 해 보니 전략폭격기의 압도적 파괴력을 알겠다" 이 선택 덕분에 당시까지 기독교 강세 지방이던 함경도는 반미로 급변했고 남한은 인천상륙작전 전까지 버틸 수 있었다.


 이를 개발자로 치환해보면 "GPT4로 업무 중 서칭을 해 보니 개발자가 근미래에 메리트를 잃을 걸 알았다. 그래서 AI에 편승할 수 있는 일로 갈아타겠다." 수준의 과감한 선택이다. 나는 그나마 앞서 언급한 굴곡을 겪어보니 용기가 생긴다. 저런 결단을 하는 순간이 다가온다면 망설임 없이 택하기 위해 몇 가지 요소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첫째로 working class로서의 전문성 자체에 집착하지 말고 현재 하는 일이 향후 자본에 편승하는 데 어떤 도움을 줄지를 고민해 봐야겠다. 대표적으로 개발자를 했기 때문에 별 망설임 없이 스타트업 들어와서 구르면서 스타트업의 실태를 파악하고 제너럴한 역량을 기를 수 있었다. 만약 제조업 유관 전공을 하면 대기업에 들어갈 때와 중소기업/스타트업에 들어갈 때 격차가 극명하고 첫 직장 이후 이직을 통한 도약이 여의치 않다. 물론 제조업 스타트업에서 갈 길 가는 사람도 많지만 나는 그렇게 할 용기는 안 난다. 반면에 개발자로 스타트업에서 시작하면 물론 이쪽 역시 들어갈 회사의 하방이 얼마나 뚫려 있을지 가늠하기 어렵고 연봉 격차도 심하지만, 스타트업이 잘되지 않아도 추후에 이직을 통한 노동소득 극대화를 얼마든지 도모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나중에 하드웨어 분야에서 창업해서 테슬라에 납품을 하게 되더라도 개발자 신분이었기 때문에 스타트업에서의 직원 동기부여 문제, 동상이몽, 용인술(특히 개발자를 대하는 기술), 협업, 소통전략, 문화, 각종 암묵지들을 스무스하게 흡수할 수 있었던 게 큰 자산이 되리라 생각한다.


 둘째로 원래 잘하던 것만 좇지 않고 제너럴한 역량을 기르는 데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아야겠다. 개발자, 이공계는 자신의 기술적 해자를 어찌 보면 대인관계/자기PR에 소홀해도 될 핑계로 쓰는 경향이 있다고 본다. 그리고 사람을 두려워하면 창업에 있어 정말 큰 디버프를 안고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내가 아직 창업을 할 준비가 한참 부족하다고 느끼면 창업에 도움이 되는 각종 기회들도 '다음에 하자'라며 그냥 흘려보내기 십상인데, 때문에 제너럴리스트적인 역량이 이미 어느 정도 갖춰진 건 큰 메리트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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