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고-오르비 토미락스님이 10년 전에 쓴 인간관계 지론

호스트가 되려는 이방인

by 반골

한 달쯤 전에 생일이었다. 일자를 전혀 의도하지 않았지만 메모어에서 만난 동년배와 원래 알던 친구 이렇게 셋이 만났을 때 내 생일인 김에 축하를 받았다. 나는 원래 날짜라는 양자 단위와 달력이라는 개념 자체가 사람이 편의상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니 의미 없다고 생각해서 내 생일도 안 챙겼고 그게 아쉽지 않았다. 태어난 순간은 딱 1회인데 연월일에서 월일이 동일하다는 이유로 N주년에 의미를 부여하는 데에 감정이입이 안됐다(물론 집단 규모의 기념일은 의미가 있다고 느껴져서 내 멋대로의 잣대이다). 어쩌면 태어난 후 주민등록이 음력으로 됐고 생일도 음력 기준으로 챙겼기 때문에 날짜 개념의 허구성을 과하게 체감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요 근래 들어서는 주변의 축하를 받았을 때 색다른 기분과 어색함이 들었다.


그럼 몇 년 전까지는 왜 딱히 타인에게 축하받고 싶지 않았을까 하면, 첫째로 진정으로 강렬한 공감대를 형성할 대상이 많지 않았으며 둘째로 인기가 없었고 진심 어린 소통의 빈도가 낮은 편이었던 영향이 크다고 생각한다. 나는 특별히 삶을 비관하는 타입이 아니지만, 그냥 태어났으니까 나름대로 살아보는 부류에 가까웠고 특별히 소비활동/집단생활에서 큰 의미를 느끼는 편도 아니라 주변인과의 강렬한 스파크가 잘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강렬하게 원하는 것들이 생기는 한편 나만의 스토리가 풍부해지면서 자연스럽게 소속감이나 동류의식을 느끼는 pool이 넓어졌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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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보니까 걸림돌이 되는 게 내가 좀처럼 '대장질'을 할 줄 모른다는 점이다. <무한도전>에서 멤버들이 길에게 각종 동호회에서 대장 해먹는 거 좋아한다고 츳코미를 한 적이 있는데, 대장질을 안정적으로 하는 건 꽤 희소하고 유용한 역량이다. 나는 장 자리를 노리기는커녕 고여 있는 집단 내에서 기여를 하여 내 입지를 다지는 행위를 경시하는 수준인데, 내심 이게 쿨함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이걸 느낀 첫번째 일화가 설날 직전에 전 직장 동료를 만나서 어떤 말을 들었을 때인데, 그는 나를 꽤나 고평가하고 있으며 나에게 우호적인 사람으로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전 직장에서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기 때문에 개발자끼리 나름 유대가 형성되었다.


자리를 파할 때 "다음에 세원님의 마피아에 끼워주시죠"라고 말하길래 내가 "페이팔 마피아?"라고 하니까 꼭 그런 게 아니어도 private한 집단 초대해 달라는 의미라고 말했다. 그도 대학 졸업하고 상경하여 인적 네트워크를 거의 0부터 만들어나가야 하는 경험을 해봐서 그런지 무리를 형성하는 것의 중요성을 종종 어필했다.


그냥 가볍게 해보는 말이었을 수도 있지만 나는 이를 통해 하나의 문제의식을 느꼈다. 친목 집단을 주도하여 오랜 기간 이끌어나가는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에 나중에 창업을 한 후에도 이 경험 부족을 신경써서 조직을 유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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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일화가 내가 직장을 그만둔 기간에 몸담았던 동아리에 활동중인 후배 4명을 만났을 때다. 나를 초대한 후배는 말하는 걸로 보아 군생활을 되게 잘했고(또 거기에 의미부여도 크고) 축구도 잘하고 남자 소집단 내에서 신의성실한 타입이었고, 형이자 인사이트를 보유한 선배인 나에게 싹싹하게 굴었고 먼저 연락해줬다. 1차로 식사를 하고 2차 장소를 정할 때 형이 가자는 곳 다 따라가겠다는 말이 나왔는데 내가 대학 시절 술자리를 많이 안 가져봐서 그런지 마땅한 데가 떠오르지 않아서 고민하다가 술집 하나를 골랐는데(이름이 Why Not이다), 홍대/신촌/강남 정도는 가야 있을 고유하고 훌륭한 인테리어의 술집이라 좋았다.


나도 술집 분위기 영향을 받아 마음이 편해져서인지 내 과거의 스토리들을 속사포처럼 풀었는데, 이 친구들이 이 전까지는 그냥 오랜만에 다같이 얼굴 볼 겸 나온 듯했는데 그제야 강렬한 흥미와 즐거움을 느끼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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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늘 이런 식이었다. 첫번째 일화의 동료도 이번에 둘이 만났을 때 이런저런 얘기를 하니까 비로소 "세원님 직장에 있을 때는 공돌이 타입이시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옷차림새며 말씀하시는 것들 들어보니까 인간적인 방면에서도 경험이 풍부하신 것 같다"라는 취지의 말을 했다. 과거에 참여했던 네트워킹 동호회 등등에서도 내 장기를 드러내면 꽤나 많은 사람이 내게 주목하여 그 후로도 관계가 이어지는 경우가 많은 반면, 내가 그냥 잠자코 있으면 조용히 묻어가다가 자리를 끝내기 다반사였다.


10년 전에 <오르비> 등지의 커뮤니티에서 어떤 네임드가, 본인은 고등학생 때까지 정말 재미없는 타입이어서 교우관계도 그냥 평범하거나 데면데면한 편이었는데 성인이 된 후 재밌는 사람이 되면서 끈끈한 관계들이 많이 생겼다는 글을 쓴 적 있다. 나는 그걸 2년 6개월 전부터 많이 느낀다.


요컨대 나는 희소하고 어떤 면에서는 뛰어나기 때문에 흥미를 유발하는 이방인이지만, 고여가는 집단을 유지하고 이끌려면 다른 종류의 역량을 탑재해야겠다는 문제의식이 든다. 지금으로선 나와 정말 결이 비슷한 소수의 사람하고만 만나는 게 편하고, 다른 사람이 있으면 이래저래 벽이 있는 편이다. 아까 언급한 동아리도 스타트업 기업가가 인적 네트워킹을 꾸준히 창출하기 위해 창립한 곳이었고, 내가 아는 다른 스타트업 대표 형님도 본인이 20년 전에 만든 동아리 인맥을 창업 초기부터 지금까지 활용하고 있다. 나도 그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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