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박문호교수가 말한 훔치기, 요약, 추진
발산능력으로 본인의 희소성을 주목받는 데 맛들린 사람은 수렴에 소홀한 경향이 있고, 내가 그런 사람임을 요즘 들어 통감한다.
얼마 전에 지인이 운영하는 독서모임에 초청받아서 갔는데 아젠다들의 자유도가 다소 높았다. 나는 평소에 자유도가 높은 주제에 대해 나의 사적인 스토리를 적절히 섞어서 마구 발산하는 데 이골이 나 있고, 특히 독서모임처럼 특별히 정답을 가리지 않아도 되는 자리에서 손쉽게 강한 인상을 주는 편이다. 어차피 뭔가를 확정하는 자리도 아니니 대충 느낌적인 느낌만 맞아떨어지는 얘기여도 되고, 그 얘기가 평소에 접하기 어려운 논지일수록 더 가치있게 마련이고, 내가 던지는 것들 중 한 50%만 나중에 곱씹어봐도 어느 정도 유익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조리있게 말할 필요도 그렇게 크진 않다. 처음 뵙는 분이 준비를 많이 해오신 거 아니냐고 물어서 그냥 프리스타일로 했다고 대꾸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유리한 구조일 뿐, 이게 바람직한 룰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사람들이 노골적으로 표출하진 않아서 그렇지, 막연한 질문 한 줄에 다다다다 떠들 마인드셋을 장착하지 않고 온 사람 입장에선 아무것도 못하고 돌아가는 격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여 나중에 '발산적 아젠다에 치중하지 않으면 좋겠다'라는 피드백을 내서 채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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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몇 달 전에 같은 모임의 회원분께 OO님은 힘 좀 빼시는 게 좋겠다는 피드백을 받은 에피소드가 있었다. 여가활동 성격이 강한 클럽에서 파하고 가는 방향이 같아서 이런저런 얘기를 했는데, 화두는 이분이 내게 "평소에 생각을 많이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혹시 위화감이 들 정도로 격차가 나는 사람끼리 한데 모였을 때의 균열에 대해 고민해보신 적 있냐"라고 물은 것이었다.
그런 거 정말 많이 봤다고 대꾸했고 예전에 알던 되게 이쁘장한 누나가 처음 집단에 들어왔을 때 여우같다는 악의적인 뒷얘기를 하는 사람도 있고 했는데 연장자를 공경하는 식으로 사회생활을 하더라고 말했다. 한편 내 학창시절에는 싸움을 잘하는 급우가 달리기를 1등하면 박수를 받지만 모범생인 급우가 달리기 1등을 하면 위화감이 돌았다고. 이분도 이 2가지 에피소드에 다 공감을 하면서 본인도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하고 신경을 많이 쓰는데, 애초에 그런 목적의 모임도 아닌 곳에서 결국엔 그런 문제 때문에 갈등이 생기더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지하철에서 먼저 내린 후 '쇼펜하우어: 지성의 저주'라는 영상을 보내드렸다. 이튿날 본인에게도 해당하는 내용같다고 답장을 하며, OO님은 무슨 계기로 이런 류의 생각을 많이 하기 시작하셨냐고 물으셨다. 나는 퇴근 직후 초저녁에 한숨 자고 일어나서 정신이 덜깬 상태로 이 카톡을 보고는 내가 절친들이랑 평소에 하는 것마냥 또 다다다다 머릿속에 있는 생각들을 최대한 많이 전달하려고 했다. 그러자 이분이 질문 하나 했는데 그거랑 너무 관련성이 없는 내용까지 한꺼번에 말하려고 한다며 자기PR에 힘 들어간 것 좀 줄이시는 게 좋겠다고, 이런 말 해주는 사람이 보통은 잘 없으니까 뭔가 본인이 오지랖 부리고 싶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사람이 자기가 사랑받은 면모를 더 강화하려는 방향으로 가게 마련인데 오히려 채우기보다 비우는 게 필요한 경우도 있다고 생각한다고. (중략)
이로부터 한 달 후 회사에서 중요한 단체회의가 있을 때 내가 나름 중요한 아젠다들을 짧게 제시했는데, 프로젝트의 시작을 알리는 회의에서 짧은 코멘트로 유의미한 뭔가를 줬다는 건 분명 긍정적인 경험이었다. 사족이지만 이것도 발산적인 주제이기 때문에 나 이외엔 하기 어려운 코멘트였던 거라 생각한다.
그리고는 이분께 고맙다고, 구체적이지 않은 주제로 많은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일개 사원이 입을 여는 게 정말 부담스러운데 그때 해주신 말을 잘 참고해서 최대한 짧게 했다고 말했다. 그러자 이분이 본인이 발언시간을 길게 가져가는만큼 다른 사람의 발언권을 뺏어온다고 생각하시면 된다 등등의 코멘트를 했다. 물론 지금도 이분이 한 여러 말들 중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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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일화 당시에는 내가 내지 니가 뭔데 그러냐는 생각이 훨씬 컸는데, 요즘 들어 일과 커리어에 대한 고민을 하다 보니 수렴의 중요성을 크게 통감한다. 일단 발산과 수렴이 중요한 상황이 어느 정도 유형화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일단 아까 언급한 독서모임과 관련한 예를 들면 구체적인 질문에 구체적인 답을 요구하는 상황(이를테면 다수의 면접)에서 평소에 수렴해놓은 짧은 문장들 중에서 적절한 걸 고르는 게 필요하고, 프리스타일의 N형 P형 대화에서는 그냥 가급적 강한 인상을 많이 줄수록 좋은 상황이 많았다. 그리고 저런 정해진 틀이 있는 수렴적인 질문에서 답을 잘하려면 보통 과거에 이미 좋은 경험을 했었으며 그걸 잘 정리해서 답해야 하는데, 그런 게 마땅치 않아서 자기포장이나 소명으로 때워야 할 때 급격히 말려들어간 적들이 있다.
또한 발산은 첫째로 많은 변화를 감수해야 하는 집단의 리더에게 필요하고, 둘째로 초창기에 무한한 자유도 속에서 개괄적인 컨셉을 정해야 할 때 빛을 발하고, 또한 최소단위 task 자체가 어려울 때에도 어느 정도 가치있다. 반면 개별 단위로 놓고 보면 전혀 어려운 일들이 아닌데 각 task끼리 일관된 규칙이 존재하지 않고 그냥 어질러져있는 것들을 빨리 끝내기 위해 역할을 나누고 스케쥴링을 하려면 수렴과 요약이 중요하다고 느낀다. 학사졸 화이트칼라에게 후자가 높게 요구되는 경우가 많은 듯 하다.
작년에 박문호 교수가 <일류가 되기 위한 3가지 조건> - 훔치기(모방), 요약, 추진을 다루는 영상을 보고 큰 인상을 받았지만 당장 내 본업에 적용해볼 계기는 없었다.
그런데 내가 내 사업을 할 게 아니라 이미 짜여진 틀에 들어가서 서로 맞물려돌아가는 부류의 일을 앞으로도 쭉 한다면, 흥미 위주로만 능력을 개량하면 안되겠다는 경각심이 든다. 돌이켜보면 요약과 수렴을 귀찮아하는 건 그 요약의 대상이 내 비대한 에고에 차지 않는 하찮고 루틴한 것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브런치나 어딘가에 글을 쓸 때에도 내 스스로 지적 충족이 될 정도의 내용만 편식하는 경향이 컸고 그냥 일상적인 내용에 소홀한 경향이 다분했는데 이젠 오히려 후자만을 위한 공간을 따로 마련해야겠다. 그리고 후자를 귀찮기만 한 일상으로 여기지 않으려면 본업에 긍지를 가질 수 있게끔 해야 한다.
* 참고로 '훔치기'를 나름대로 정의하자면 보통 사람들이 이 사람에게선 이걸 배우고 저 사람에게선 저걸 배우는 식의 모방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 모방만 잘하면 내가 직접 뭘 창조하는 능력이 좋지 않아도 대단한 일을 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요약'이란 어떤 개념을 단순히 접한 적이 있다 를 넘어서 특정 맥락에서 필요한 내용을 즉발적으로 꺼낼 수 있는 경지에 다다르는 거라고 이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