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나는 대학에 갔다.
대학에 가서도 그 사람의 연락은
드문드문 이어졌고,
가끔 찾아오는 방문 속에서
나는 부모 대신의 편안함을 느꼈다.
대학 시절, 내가 아팠을 때
두 시간이 넘는 거리를 달려와
약 봉투를 건네주고
아무 말 없이 곁에 있다가 돌아간 적도 있었다.
IMF를 겪으며 우리 집은 더 가난해졌다.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건 공부뿐이었다.
강의실, 도서관, 과외.
내 대학 생활은 이 세 가지가 전부였다.
그 외의 어떤 것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대학 시절의 추억이 없다.
매 학기 장학금을 받았고,
난방이 제대로 되지 않는 자취방에서
근근이 버티며 4년을 보냈다.
그리고 첫 번째 임용시험에서 떨어졌다.
나의 첫 번째 임용시험 불합격은
우리 집에서는 꽤나 충격적인 일이었다.
아무도 나를 위로하지 않았다.
그때도 지금도
임용시험 재수는 흔한 일이지만,
내가 공부만 하며 1년을 더 보내는 일은
우리 집 형편에서는 사치였다.
그래서 나는 다시 책을 펼칠 수 없었다.
엄마가 원하던 대로
집에서 가까운 학원에서 강사 일을 시작했다.
그 무렵, 우리 집은 더 가난해졌고
잦은 이사로 이 집 저 집을 옮겨 다녔다.
그 과정에서
함께 끌려 다니던 내 피아노도
결국 헐값에 팔게 되었다.
그날은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분명히 슬픈 날이었다.
그때도 그 사람은
종종 내가 일하던 학원 근처로 와
차 한 잔을 나누고,
말없이 나를 오래 지켜보다가 돌아가곤 했다.
그 사람의 존재는 위안이 됐다.
그 시기, 내 삶에 허락된 위로는
그 정도가 전부였다.
월급의 반은 집안에 보탰고,
남은 반은 저축했다.
그 시절의 나는
선택할 수 있는 것보다
감당해야 할 것이 더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