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OTT LIFE

칼리토. 넷플릭스. 1993.

시대에 도태된 희귀종.

by 망고푸딩

칼리토. 넷플릭스. 1993. (스포일러 포함)


입에 착 달라붙지 않지만 원제가 작품 메시지와 주제의식, 서사에 맞다. 제목으로서 차별성도 도드라진다. 'Arrival'은 포스터에서 내러티브가 시작하는데, 창조된 것으로 보이나 인공 아닌 물체의 주인인, 누가 어떤 목적으로 도착했는가를 어떻게로 풀어간다. 제목부터 미지에 대한 서사가 시작한다. 그래서 컨택트는 엉터리 제목이다. 마찬가지다.


찰리는 공권력의 사냥감이었다 생사가 뒤집어진 순간 덧없는 보호를 받는다. 한줄기 불빛 아래 응급처치 침대에 실려가는 동선과 주마등처럼 스쳐간 행적을 보는 눈, 그가 살아온 방식과 의지에 대한 독백이 있는 프롤로그의 내러티브는, 'Way'라는 중의적인 제목으로 이미 포스터에서 시작해 에필로그까지 이어지기 때문에 '칼리토'는 가장 중요한 부분을 잘라 버린 것과 다름없다.


의리, 그 허구.


깡패들은 사람들이 파악할 수 없는 선을 넘지 않는 한 식구를 잘 내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기업에서 손해를 끼치는 저성과자 같은 구성원을, 앓는 이 참아가며 달고 사는 것처럼 당연하게 여긴다. 재원의 역할과 결과물이 제도권과 다르기 때문이다. 이쪽에서 의리를 관계에 따른 신뢰와 도리라 한다면, 그쪽에서 의리는 폭력과 착취의 캐스케이딩을 유지할 기만적 통제 이념이다. 깡패는 부하를 의리 명분으로 평소 쓰임에 반비례해 비정하게 소비한다.


어디까지나 창작 영역에 있는 칼리토의 의리는, 고도로 내재화된 '가오'에 기반한 조직시민행동, 이미 반대급부가 이루어진 거래관계에 부채의식까지 상환하기 위해 헌신하는 양식으로 드러난다. '모종의 조력'과 '조력자와의 관계'가 가진 의미를 동일시하고 일방적 믿음에 대한 배신을 확인하기 전까지 관계를 놓지 않는다. 그의 의리는 그를 범죄조직의 전설로 만들었지만 경로의존성으로 인해 피할 수 있었던 비극을 맞는다.

여자말 들어야 한다.

각자의 생리.


갈등이 발생했을 때, 조금만 접거나 오해 풀 단순한 워딩만 하면 되는데 깡패들은 그 합리적 걸 절대 안 한다.


양지에서 사회가 요구한 기능을 기형적으로 갖추고, 조직이나 국가가 부여한 공동체를 위해 존재하는 권한을 좁은 문 통과한 보상과 권리로 여겨 권한남용하거나 직무유기하는, ‘안경잽이’의 심리지체가 발현된 몽니와 다르다. ‘안경잽이’는 한정적으로 부여한 과도한 권한과 영향력을 제 실력으로 착각한다. 그런 착각에 충분한 근거가 있는 것이, 엘리트 부패 카르텔은 공고하기 때문에 지위가 부여한 권한을 권력으로 행사하는 것이 투철한 동업자 연대로 보장된다. 그들의 성능 좋은 뇌는 그 바닥에 눈부신 속도로 적응하고 이런 퇴행은 비가역적이다. 그래서 미숙한 자아가 가늠할 수 없는 힘을 통제할 상황에 닥치면 책임질 수 없는 사고를 친다.


야생동물과 같은 생리로 사는 깡패들은 실력과 권위가 맞붙는 때 양보하면 사건의 지평선을 넘어간 걸 나중에 깨닫는다. 보고 들어 잘 알기 때문에 그들은 절대 물러서지 않고 한번 일어난 승부는 끝이 없다. 항상 실력과 권위를 유지해야 한다. 타협이나 거래가 성립했다면 실질은 위계가 형성된 것이고 그들의 상징물, 가치, 근본가정은 돈, 하나이기 때문에 지분이 곧 서열이다. 소사나 데이비드가 횡령한 것은, 단순히 손해를 끼친 문제가 아니라 전면 도전이고 여기서 관용은 연이은 다른 도전을 야기하므로 묵과할 수 없는 일이다. 안경잽이 데이비드가 양지에서 해도 비호받을 수 있는 일을 음지에서 벌였을 때 이미 활로는 없었다.

법과 범죄는 돈과 여자로 엉켜있다.

가진 것 없는 사람의 삶이 내몰렸을 때, 엘리트와 깡패 중 골라야 한다면 깡패를 택해야 생을 이어갈 수 있다. 그들은 착취하기 위해 생태계에 포섭하지만 엘리트는 자기 이익과 안위의 연장선 밖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의무행위조차도. 멀쩡한 시스템 안에 있었는데 생은 거기서 끝난다. 제도는 정당한 요청을 외면하고 사회에 내 자리 없는데 상처받고 헐벗은 내게 옷 덮어주는 사람 나타나면 그 복잡한 정서는 당사자 아니면 알 수 없다.


댄서 게일.


남자는 여자가 잘 거른다. 여자는 그 걸러진 바람이 흔들어도 떨어지지 않는 마지막 잎새다. 게일은 재능을 환가할 클럽 무대에서 자기 원칙을 지키며 세상에 홀로 던져진 두려움과 외로움을 남다르게 견디며 산다.


퇴물 조폭이 알 파치노라면 다른 논리 없이도 반하기에 충분히 타당하다.(양조위가 악역이면 세계가 잘못한 거지) 그 다른 논리는, 전문적이지만 방어적인 폭력을 행사하고 일반인에게는 위협적이지 않으며 뭘 해도 일가를 이뤘을 호기로운 남자가 하필 그쪽으로 발을 들여놓았고 이제 벗어나려 하므로 여자가 신뢰할 이유가 있다.

기다려.

세상이 게일에게 소유를 허락한 것은 찰리뿐이다. 찰리는 열등감이 없다. 그래서 게일 그 자체로 충분하다. 연애 상대로 찰리는, 필요한 만큼 기다리고 필요한 때 나타나 유희에 발맞추고 소소한 판타지를 실현시키는 지니다. 마음 놓고 나를 해방할 또 다른 무대다. 부서진 꿈에 기대어 사는 게일에게 찰리는 휴식과 위안을 준다. 웃을 수 없는 인생에서 찰리로 인해 웃을 수 있다. 무엇보다 시시한 남자가 아니다.


댄서 게일이 가장 그녀답고 아름다운 것은 흥겨워 춤출 때이고 그녀에게 가장 큰 상실감을 주는 것도 춤이다. 찰리는 그녀의 춤이 가진 양면에서 게일을 위한 춤은 게일에게 반대편 날은 자신을 저미게 두고 사랑하는 사람을 그러한 대로 지켜본다. 여기서 지위 없이도 실력과 확신으로 자신 있는 남자와 지위 없이는 비열함만 남는 자신 없는 놈의 차이가 드러난다.


막다른 곳에서 기댄 연인이 낙원으로 떠나는 것은 단순한 청산과 도피 의미를 넘어 각자의 존재증명이자 자신을 파괴하는 이면, 즉 등 떠밀려 부여된 갱스터와 댄서가 가진 모순적 정체성을 단절하고 자신의 선택으로 자기규정할 수 있는 다른 세계로 건너가는 것이다.


Carlito's Way.


찰리는, 어렵게 맞춘 균형을 포기하고 불확실과 미지를 함께할 수 있는 여자의 애원 앞에서 어리석은 자기 방식을 우선한다. 게일은 거듭하는 질문으로 용납할 수 없는 찰리의 준거에 맞춰 가고 그는 싫어도 인고해야 하는 유리될 수 없는 생의 일부가 된다. 허나, 찰리에게 게일은 이루고 싶은 꿈, 닿지 못한 낙원이고 순수하게 추구한 목적이다. 게일에게 찰리는 나였고, 찰리에게 게일은 나의 너였다. 그래서 칼리토의 길 위에 게일이 있다. 찰리는 사는 것에 최선을 다했으므로 나와 다른 너를 믿었으므로 자신의 길을 더 가는 것을 여한 없이 단념할 수 있었다.

알 파치노가 영국을 떠나지 않았다면.

낙원 수미쌍관 신은 때가 돌아오면 TV 어디서든 쓰는 명장면이고 영화를 아는 사람들이 저마다 근사한 해석 덧붙인다. 앞으로 몇 번을 말할지 모를 소리, '어렸을 때 우연히 접한 장면... 보려고 벼르다 이제 본 영화...' 를 보고 내 주관을 남겼다.


'클로이'로 연기 감상 맛 알았고, '007 스카이폴'로 색에 눈떴고 '올드보이'가 말로만 듣던 미장센을 퍼먹여 줬다면, '칼리토의 길'은 심장 조물딱 거리는 ‘연출력’으로 시네마 키드에게 이정표 된 영화다. 연인을 만나는 매 순간이 내 일처럼 두근거리고 결말을 다 아는데 안달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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