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른 차원에서의 다른 생각. 예이츠 '쿨리에서의 야생의 백조'
서양에서는 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티페가 세계 3대 악처 중의 한 사람이라고 흔히들 말한다. 어느 다른 채널에서 나는 이런 주장에 대해 정색을 하고 반박을 한 적이 있다. 세상 모든 것은, 특히 부부 사이의 일은 상대적인 면이 강한 것이라고. 가정 주부로서의 크산티페의 입장을 한 번이라도 생각해보고 하는 말이냐고? 돈을 벌어오나 세 아이들 양육이나 교육에 신경을 쓰나, 그렇다고 아내에게 다정하고 싹싹한 구석이 있나? 더구나 아내보다 한참 늙고 엄청 못생긴 얼굴이었다 하니 도대체 볼 것이 뭐가 있나 소크라테스 그에게?
그럼에도 철학자로서의 소크라테스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오늘 소개하는 그의 말이 내게는 큰 무게가 실린 것이었다. 사람들은 말한다. 평생 단 한 번도 울지않는 백조, 그도 죽을 때는 소리내어 크게 운다고. 왜? 슬퍼서! 죽음은 그만큼 크고 슬프고 무서운 것이라고.
소크라테스가 이에 대해 반박한다. 아니, 그건 사람들이 백조에 대해 잘 몰라서 하는 얘기라고. 백조를 너무 가볍게 보는 것이라고. 아무리 배가 고파도, 춥고 힘들어도, 그 어떤 경우에도 결코 울지않는 백조가 죽음에 임박해서 그 죽음이 슬퍼서 우는 것이라고? 아니라고, 그 정도의 백조가 아니라고. 백조는 아폴론의 예지를 닮아서 그것보다는 몇 배 높은 단계에 있는 존재라고. 거의 다른 차원의 그런 존재라고.
그럼 왜 우나? 소크라테스의 답은 이렇다. 이제 곧 신을 만날 수 있음을 알고 그 기쁨에 우는 것이라고. 조만간 신의 세계에 합류하면 자신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날 지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가슴이 뛰고 설레고, 아 이제 이 세상에서의 힘든 시간들은 더 이상 없겠구나, 그 벅찬 생각에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것이라고!
역시 소크라테스다운 대답이라고 손뼉을 치며 나는 기뻐했다. 나도 이런 끝을 맞으면 좋겠다 그리 생각했다. 그리고 늘 노력한다, 백조의 이런 마음을 닮아가려고! 멋지지 않은가 백조의 그런 쿨한 생각이? 그의 예지가, 그의 낙관적인 태도가? 그의 그 의연함이?
우크라이나 태생의 러시아 발레리나 율리아나 로파트키나를 좋아한다. 그녀의 모든 것이 좋다. 외양도 그녀의춤도 그녀의 어린 시절을 기록한 다큐멘터리도. 아, 그녀의 예쁜 딸도! 사실 나는 발레를 전혀 몰랐다. 아니 아예 가까이 가는 것을 싫어하고 거부했다. 이 또한 편견이었다. 도대체 발레를 왜 보나? 발레는 그저 발로만 하는 것인가, 이런 농담섞인 생각까지도 앞에 내세우면서.
어느날 우연한 기회에 그녀가 추는 4분짜리 아주 짧은 발레 영상을 보았다. 그 이후 발레에 대한 내 생각은 완전히 바뀌었다. '죽음을 맞는 백조 (The Dying Swan)'다. 국내에서는 '빈사의 백조'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나는 아주 부적절한 표현이라고 보는 사람이다. 도대체가 예술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백조' 또한 사실은 적절한 말은 아니다. 백조도 있고 흑조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니라고 부르는 것이 더 큰 카테고리다. 그 안에 우리가 일반적으로 백조라고 부르는 하얀색 고니가 있고 흑고니가 있고 혹고니도 있고 붉은부리고니도 있다.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 (Swan Lake)'에서도 백조 ('오데트')와 흑조 ('오딜')가 함께 나오지 않나? 물론 한 무용수가 공연하기는 하지만!
율리아나 로파트키나의 여러 공연을 보고 나는 비로소 '발레는 결코 발로만 하는 예술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포인트 슈즈를 무려 280밀리짜리를 신는 그녀, 그녀의 긴 팔과 큰 손과 긴 손가락 그리고 어깨선과 목선, 그 선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은 우산처럼 옆으로 쫙 퍼진 클래식 튀튀 (발레복)를 입고 마음껏 과시하는 발레리나들의 무릎 아래 발동작과는 또 다른 멋과 맛이 있다. 내게는 그랬다. 가슴이 뻥 뚫리는 시원함이 있다.
좀 썰렁한 소리를 보태자면, 옛날 유럽의 왕실에서는 백조 고기를 먹었다고 한다. 나로서야 그 맛을 알 길이 없지만 아주 맛있다고 책에는 쓰여있었다. 그 뒤 백조를 먹을 수 없게 되자 오리나 거위를 먹었다는 얘기. 거위는 맛은 있는데 워낙 고기의 양이 적어서 소위 가성비의 이유로 오리에게 그 수요가 밀린다고 한다. 값은 원래 오리보다 비싼 데 먹을 것도 오리의 1/3 수준이라니, 그 가격의 높음은 더욱 두드러지는 것이다.
이제야 오늘의 시를 본다. 나는 벌써 가슴이 두근거린다. 원래 예이츠를 좋아하는 데다가 오늘의 이 시는 내게는 참으로 좋았기에 그렇다. 삼십 년 이상을 한 여인에 대한 일방적 사랑 ('짝사랑')으로 가슴 앓이를 한 그의 무모할 정도의 낭만적 기질도 나는 괜히 좋았다. 52세에 한 그의 전격적인 결혼도 그랬다. 평생 신비주의와 초자연적 현상에 심취했던 그의 특이한 취향도 내게는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그의 심오한 시 세계는 따로 말할 필요도 없고.
쿨에서 지켜본 야생의 백조들 (The Wild Swans at Coole)
-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나무들은 가을의 아름다움을 한껏 드러내고 있다, 숲속의 길들은 기분 좋게 말라있다,
시월의 황혼 아래 고요한 하늘이 거울처럼 물에 비친다 ; 돌들 사이 넘치는 듯한 물 위에
쉰아홉 마리의 백조들이 있다.
내가 처음 백조들을 세기 시작한 이후 벌써 열아홉 번째 가을이 내게로 왔다 ; 내가 미처 다 세기도 전에,
갑자기 백조들이 날아오르고 흩어진다
부러진 여러 개의 거대한 고리의 모양을 하고 요란한 날개짓 속에.
나는 찬란하게 빛나는 그 생명체들을 지금껏 경외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지금 내 마음은 그저 슬프고 아프다. 모든 것이 변했다 황혼 녘에, 이 물가에서, 내 머리 위로 종이 치는 듯 들려오던 그들의 날개짓 소리를
처음 들은 그날 이후로, 참으로 가볍게 걷던 그때 그들의 모습.
지칠줄 모르고 평온하게, 모두들 각자 사랑하는 짝 옆에서 그렇게, 그들은 차가운 그러나 그들이 친구할 수
있는 부드러운 물에서 아기처럼 걷고 있다, 그리고 때로는 공중으로 떠오른다 ; 그들의 마음은 단 한 번도
나이를 먹은 적이 없다 ; 열정 혹은 강인한 정복의 의지, 그냥 늘 그들이 뜻하는 곳으로 걸어간다,
조용히 그것들을 따른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고요한 그 물을 벗어난다, 신비하고, 아름다운 그 물의 흐름을 ; 이제 다시 어느 골풀
사이에 그들은 둥지를 틀 것인가, 어느 호수 가장자리 또는 물가에서 나 아닌 다른 남자들의 눈과
마음을 기쁘게 할 것인가 어느 날 내가 정신을 차리고 그들은 이미 날아가버렸음을 알게되는 그때에?
<우리말 번역 - 가을에 내리는 눈>
# 쿨 (Coole) - 아일랜드에 있는 작은 도시. 예이츠는 이곳에 머무르며 그의 나이 51세 때 이 시를 썼다. 결혼하기 1년 전이다. 아일랜드 슬라이고 카운티의 작은 호수 섬 이니스프리를 두고 그 유명한 시를 쓴 것과 같이, 그는 이곳에서 백조를 바라보며 이 아름다운 시를 썼다.
# 백조가 상징하는 아름다움, 열정과 젊음, 항상성 및 영원성과 대비해서 나이 들어가는 자신의 모습, 외로움, 슬픔, 예술의 세계와 그 속에서의 자신의 현실적인 시작 활동, 그 당시 한창 불붙었던 아일랜드 독립운동에서의 자신의 제약적이었던 참가 등을 슬퍼하고 아쉬워하는 내용이다. 예이츠는 인간의 (특히나 자신의) 늙어가는 것 자체를 유난히 싫어했다. 거의 병적인 반응을 보이는 모습이 그의 시 여기저기에서 드러난다. 오래 살았다, 74세까지 살았으니!
# 시에서 시인이 센 백조의 숫자 쉰아홉 마리 (59), 홀수. 짝이 없는 한 마리는 여전히 혼자인 시인 자신을 상징하고 있다.
그의 시에서의 가장 큰 특징은 자신에 대한 혹은 어떤 상황이나 배경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없이, 천연덕스럽게 자기 할 말을 다 쏟아낸다. 그러니 읽는 사람들은 그때 그한 처한 그의 개인적 상황, 그때의 시대적 사회적 환경 등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그의 시를 제대로 맛볼 수 있다.
굳이 노벨문학상 수상자여서가 아니라 그의 시는 참으로 깊다. 사람으로 하여금 많이 생각하게 한다. 나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내가 그의 시를 특히 좋아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