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기적 동기, 나의 흔적, 존재 드러내기. 이해인 '침묵'
최근 2-3년 전 부터는 '우연의 얼굴을 하고 내게 찾아오는 필연들'이 우연처럼 많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어떤 한 가지 일이 내게 일어나려면 그 전에 적어도 300번 이상의 징후나 조짐이 이미 내 가까이 왔었다는 얘기를 어디서 읽은 적이 있다. 어쩌면 우연은 그만큼 힘들다는 말일 수도 있다. 우연인 듯 보여도 사실은, 결국에는 오고야 말았을 필연이라는 말도 된다. 나는 그리 아전인수식으로 새긴다.
브런치라는 플랫폼을 알게된 것도 얼마되지 않았다. 사실은 유튜브를 먼저 시작했다, 이 나이에. 그런데 시를 좋아하는 지인 한 분이 브런치에 글을 쓰면 상호 연동도 되고 좋을 것이라는 얘기를 내게 해주었다. 일상 속 살아가며 철학하는 얘기를 다룬 나의 유튜브 프로그램은 보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래도 나는 꾸준히 한다. 애초 그 목적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내가 직접 말하는 녹음 파일을 중심으로 한 포맷 또한 그 특별한 목적을 위해 구상했다. 보는 영상 중심의 작품이 아니다. '훗날 언젠가 사랑하는 나의 아들이 갑자기 아버지 목소리가 듣고싶으면 어떻게 하지?' 물론 우리 둘의 평소 스카이프 대화를 녹음해 둔 것은 여러 개 있다 (당연 아들의 사전 동의를 구하고 녹음했다!). 하지만 그것과는 또 약간 그 성격을 달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그 유명한' 만인의 유튜브 아닌가? 또 단순한 대화의 녹음이 아니라 나의 아버지가 어떤 주제에 관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외부의 불특정 다중을 위한 것 아닌가? 그에게 충분히 그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그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나는 충분히 '이기적인 동기'에서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제 두 달이 채 못되었다. 열심히 묵상하고 열심히 준비하고, 열심히 쓴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동기나 목적에 가치를 둔 일의 진행과 그 성취에 집중했다. '왜? 무엇을 위해?' 이런 질문과 의문이 늘 등장한다. 우선 나 자신에게 설명할 수 있어야했다, 그래야 내가 움직였다, 신나게 아주 신이 나서 그렇게!
하나, 나는 분명 무언가를 바라고 있었다. 구체적으로 톡 집어낼 수는 없지만 '무언가 좋은 것들'이 내게 올 것 같았다. 작가 소개란에 평소 하지 않던, 아니 크게 삼가던 직설적인 접근법을 쓴 것도 그것 때문이었다. 혹시 모를 좋은 일들이 보다 쉽게 나를 찾아올 수 있도록!
이제는 어느새 세상 저편, 보이지 않는 곳에 사는 나를 누군가가 어떤 '기회'를 가지고 찾아나서기를 기대했던 것 같다. 어느날 낚시를 하던 강태공 (태공망/강상)이 주군 서백 창 (훗날의 주나라 문왕)을 만난 것도 무위도식하던 나이 든 그때였다. 물론 그와 나와의 비교는 턱도 없는 일인 것을 안다. 하지만 혹시 아나? 내게도 그런 주나라 문왕같은 사람이 짠하고 나타날지? 생각지도 못한 기회가 다시 찾아올지?
결코 일어나기 쉽지 않은 일임을 충분히 알면서도 여전히 그 꿈 혹은 바람은 그대로 가지고 있다. 어쨌든 그게 나를 움직이는 힘이 되어줄 것이니까!
둘, 아들 녀석을 위한 아버지의 흔적 남기기의 한 형태다. 어쩌면 앞으로도 내가 힘차게 글을 쓰게 할 가장 확실한 동인인지도 모르겠다. 이건 누가 이루어주고 말고 할 것도 아니고 분명 100% 이루어지는 성격의 현실적인 목적이니까! 이런 안전장치가 있어서 좋다, 다행이다. 그래도 좋지않겠나, 언젠가 이런 좋은 플랫폼에 올라가 있는 아버지의 글을 읽는다는 것이? 자신과의 아름다웠던 에피소드들도 군데군데 들어있고?
셋, 결코 의도한 바도 아니고 그런 생각 손톱만큼도 없지만, 또 어찌보면 내 안에 혹시 '나라는 사람 여기있어요/한 번 이쪽을 봐주세요/제가 그래도 이 정도의 글을 쓴답니다/어때요, 제법 괜찮지않아요?' 뭐 이런 자랑의 마음 혹은 나를 드러내고 싶은 유혹이 은근히, 은연 중에 담겨있는 것은 아닌가?
늘 경계하고 조심한다. 이제 그럴 나이는 지났다고 살짝 안심은 하면서도 사람일 모르는 것이다, 그런 경계는 여전히 하고 있다. 그러니 그런 사람은 아니라는 너그러운 생각을 가져 주시면 좋겠다. 그런 의도는 전혀 없음을!
넷, 누군가에게 혹여 되먹지도 않은 조언/충언/도움의 말을 주려는 의도 또한 없음을 알아주시라. 성경에 보면 다섯 가지 형태의 오만/자만에 대해 말하고 있다.
첫째는 내가 다른 사람보다 낫다는, 그야말로 오리지널 자만과 오만이다. 쉽게 이해가 갔다. 두번째는 내가 이룬 재산 혹은 부가 나 혼자만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당연 나 혼자만의 것이라는 독점적 소유의 사고다. 이 부분은 처음 읽었을 때도 그렇고 지금도 여전히 공감하기가 쉽지는 않다. 절대 너만의 힘으로 얻은 재산 아니고 그러니 다른 이들과도 나누고 함께 해야 한다는 그런 의도와 메시지인 것은 알겠는데, 그게 그리 쉽나?
세번째는 나는 신의 은총과 자비를 받을 충분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다. 내 믿음의 구력이 얼만데? 내가 교회에 내는 돈이 얼만데? 내 믿음의 깊이를 그 누구와 비교하겠어? 나같은 사람에게 은총과 축복을 주시지 않으면 누구에게 주시겠어?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우선 그 또한 지극히 주관적인 자기중심적 사고의 전형이고, 무엇보다 신의 자비, 은총 그리고 축복은 무슨 자격이 있어서 주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신의 판단과 뜻에 달린 것이라는 뜻이다. 네번째는 무엇을 하기 전에 먼저 신에게 묻고 그분의 뜻을 기다리고 그 다음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시작하는 것이 맞다는 지적이다. 그저 자신의 생각에만 기초해서 무언가를 하는 것, 이 또한 오만과 자만의 한 형태라고 성경은 지적한다. 나로서는 크게 공감하기는 힘든 부분이다.
다섯 번째, 누군가에게 충고하고 조언하고 마치 그 누군가를 그렇게 가르치려는 듯한 태도에 대해 말하고 있다. 처음에는 이 부분도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아니 지극히 선하고 좋은 의도에서, 더구나 상대방이 청하니까 나름 좋은 일 한다고 말해주는 것인데 그게 왜?'
시간이 지나고 내가 크게 깨달은 것이 있다 - "그 사람도 다 생각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름의 사정이 있을 것이다."
세상에 바보는 없다. 그 사람이라고 나만큼 모르겠나? 분명 내가 모르는 사정이 그에게는 있는 것이리라. 그래서 그리 하지 못하는 것이리라. 그런데 그 사정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내가 무슨 충고를? 나의 충고나 조언에 대해 그가 이렇게 말하면 그 난감함을 어찌할 것인가? - "나도 아는데, 나 그 방법 싫어. 그래서 아예 처음부터 제껴놓았어./좋은 말인데 내가 지금 그런 자금의 여력이 없어./네가 모르는 것이 몇 개 있어. 굳이 여기서 털어놓고 싶지는 않은데 그런 것이 있어 아무튼. 그래서 못하는 거야./아버지, 좋은 말씀인데요 제가 그럴 능력이 안되요. 정말 솔직하게 말씀 드리는 거에요!"
능력이 안된다는데 어찌할 것인가? 본인보다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파악하는 사람이 누가 있을 것인가? 그런데도 또 이리 몰아세울 것인가? "아니, 너는 할 수 있어!" 아버지가 하는 것 아니고 제가 하는 것이잖아요? 제가 할 능력이 부족하다고 실토하는데 그렇게 무턱대고 할 수 있다고 말하시는 아버지는 어디에 근거한 건가요? 물론 나의 아들이 이런 말을 한 적은 없다. 내가 서운해할까봐도 그런 얘기는 쉽게 할 아이가 아니다. 그건 내가 안다.
그 충격적인 깨달음 이후 나는 그 누구에게도 충고라는 짓을 하지 않는다. 아들 녀석에게도 하지 않는다. 물론 아들이나 아주 가까운 사람이 작정하고,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 고민을 토로하며 내게 조언을 구할 경우에는 다르다. 그때도 내 생각을 그와 나누지 않는다면 그 자체 또한 크게 잘못된 것이다. 아버지의 자세가 아니고 충분히 가까운 사람의 태도가 못된다.
혹시 제 글에서 이런 구석이 보인다면 오늘의 이 얘기를 떠올려주세요. 아니라고, 전혀 그런 의도나 의향이 없다고. 그저 알고 있는 '정보와 경험'을 공유하는 것 뿐이라고. 필요한 분은 가져다가 쓰실 것이고 그렇지 않은 분은 그냥 버릴 것이라고.
나는 왜 브런치에 글을 쓰는가에 대해 말씀 드리고 있습니다. 네, 이런 목적에서입니다. 분명 이루어질 것도 있고 그렇지 못할 것들도 있습니다. 그래도 외통수 단 하나의 목적만 있는 것은 아니니 그나마 다행입니다.
지난 주 저의 첫번째 브런치북을 발간했습니다. 앞으로도 열심히 써서 더 많은 브런치북을 낼 생각입니다. 100개 정도의 글을 쓰면 그래도 '아 나름 열심히 좀 썼네?' 이리 저 자신을 칭찬하고 격려할 수 있을 테니까요!
오늘의 시를 봅니다. 글을 쓰는 행위는 침묵의 범주에 들어간다는 궤변을 저는 지금 말합니다. 그리 이해해 주세요. 말을 많이 하지 않으니, 아니 요즘은 거의 말을 하지 않으니 그래서 침묵 속에 이렇게 글을 쓰는 것이라고 그렇게!
차가워도 맑고 깊으니 그것만으로도 아름답다,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침묵의 우물 앞에 맑은 마음으로 혼자 서면, 그렇게 자꾸 그 안을 들여다보면 어느새 많은 소리들이 내게 들려온다 - 멀고 먼 길 돌아서 그래도 결국에는 집에 돌아온 나의 웃음소리, 오래 오래 나를 기다려온 하느님의 기쁨이 찰랑이는 소리.
잘못? 사랑으로 고치면 된다고 이웃들이 먼저 내게 웃음으로 다가오고, 그 고마움에 말없이 눈물 흘리는 내 두 눈. 지난 세월 말로 지은 그 많은 죄, 잠시라도 잊고싶으면 그리고 다시 맑음으로 우물처럼 그리 깊어지고 싶다면 고요히 침묵의 우물 앞에 서면 된다. 이제는 마구 내뱉고 싶은 유혹을 참고 오늘도 누군가를 향해 손가락질 하고 싶은 그 충동을 참아내고, 이전과는 다른 시선으로 사람을 보고 사물을 보는 그런 맑음으로 돌아가고 싶다면!
내가 브런치에 글을 쓰는 이유요? 침묵하기 위해서, 나를 위한 선함과 의로움을 위해서, 그리고 사랑하는 나의 아들을 위해서! 어느 날 주나라 문왕같은 귀인이 나를 찾아온다면? 필시 '불감청 고소원'의 우연을 가장한 필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