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가 높은 곳에서는 밥이 설익는다

- 내려놓음의 순리, 높은 곳의 함정, 돌 하나. 조병화 '낙엽'

by 가을에 내리는 눈

지금 머무르고 있는 이 나라의 이 도시에서 경험한 낯선 일이다. 지난 번 있던 나라에서는 감자를 삶는데 20분 정도면 푹 익었는데 이곳에서는 40분이 지나야 익는다. 가끔 해 먹는 밥도 엄청 오래 걸려야 쌀이 익는다. 이상했다. 알고 보니 고도 때문이었다. 고도가 1,000미터 이상이면 고산지대로 분류한다고 한다. 이곳은 해발 1,500미터에 위치한다. 그러니 당연 고산지대다.


고지대에서는 압력이 약해져서 음식을 익히는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물이 끓는 것 같아도 사실은 물의 온도가 우리가 알고 있는 100도가 아니다. 끓는 점이 낮아져서 그 이하의 온도임에도 우리 눈에는 끓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강불인 듯 해도 사실은 중불인 셈이다.


어릴 때 아버지와 산에 캠핑을 가면 아버지는 밥을 지을 때 꼭 냄비뚜껑 위에 무거운 돌을 하나 얹어놓으셨다. 그래야 밥이 제대로 된다고. 지금 생각해 보니 바로 낮아진 기압을 무거운 돌로 해결하신 것이다. 그 기억이 이제야 났다. 아버지가 애써 가르쳐주신 것을 나는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감자나 밥이야 익을 때까지 더 가열하면 된다. 익었나 익지 않았나 그 자리에서 바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가짐은 그렇게 쉽게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어렵고 힘들다. 나는 지금 어느 정도의 고도에 올라와 있는 것인가? 평정심을 유지하며 그렇게 큰 문제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고도 높은 곳에서의 밥이 자칫 설익듯이 우리 또한 어쩌다 내게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으면 여러 면에서 설익을 수 있다. 방심이 그렇고 오만과 자만이 그렇다. 과욕이 그렇고 충분히 계산되지 않은 위험의 수용이 그렇다. 평소 우리를 제어하던 그 압력이 낮아져서 끓는 점이 낮아진 까닭이다. 쉽게 흥분한다, 혼자 달이 뜬다, 자신을 과대평가한다, 하룻강아지처럼 무모한 싸움을 시작하기도 한다.


'호사다마 (좋은 일에는 마가 많다, 좋은 일은 탈도 많다)'만 해도 그렇다. 원래는 이 사자성어에 마귀 마자가 아닌 갈 마 (곤란을 당하다, 재앙)자가 쓰였다. 좋은 일에는 방해가 되는 일이 많이 생길 수 있으니 방심하지 말고 늘 경계하라 이런 경구다.


나는 예전에 이 문구를 볼 때면 공정성 혹은 형평의 원칙 이런 것들을 생각했다. 좋은 일 많이 주었으니 이제는 또 그 반대의 것들, 즉 좋지 않은 것들 마귀같은 그런 것들을 주는 것이라고. 그런데 그 뒤에 다시 생각해 보고는 다르게 해석하게 되었다. 이번에 나쁜 것들을 주어서가 아니고 내가 그 많은 좋은 것들에 취해서 크게 변화된 상태에 있기 때문이라고. 방심으로 인해 평소의 그 탄탄하던 방어가 느슨해지고 자만과 오만으로 가득한 상태에 있게 되고, 무리한 일들을 자주 감행하고. 그런 모든 것들의 결과가 결국은 나쁜 일들의 도래로, 나쁜 결과로 이어지는 것이라고.


'지족불욕 지지불태' - 만족을 알면 치욕스러운 일을 당하는 꼴을 면할 수 있고 멈추어 설 때를 알면 위험에 처하지 않는다. 정확히 내가 하려는 말과 일치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게 쉽지가 않다. 늘 경계하고 기억하고 경구로 삼아도 자칫 한순간에 그 위험에 빠지고 만다. 그게 우리네 인간이다.


어쩌면 그래서 오늘 나는 이 글을 쓰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선 나를 위해 그리고 브런치의 어느 독자님들을 위해.


아들 녀석 어릴 때 늘 내가 그에게 한 말도 이와 결을 같이 한다. '오버하지 말라고, 늘 어깨 아래 무릎 위에 머무르려고 힘쓰라고.' 굳이 중용이라는 말을 쓰지는 않겠다. 이것은 이루기 너무도 힘든 덕목이기 때문이다. 거의 신선의 경지에나 가야 할 수 있을까?


산술평균도 아니고 (average) 중간값 (mean - 줄을 세워서 정확히 그 가운데에 있는 것의 값)도 아니고, 도대체 '가운데/더도 덜도 아닌 상태/딱 맞는 중간'을 어찌 알 것이며 알 지도 못하는 그 경지에 어떻게 도달할 수 있다는 말인가? 논어 맹자 중용 대학 중에 나는 중용이 제일 어렵다, 도무지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가 없다. 그렇게 포기한다. 그래서 논어가 좋고 그래서 또 맹자가 좋다. 차라리 노자와 장자의 사상은 신비함 속에 이해는 간다.


내가 조금 '높은 곳'에 있다 싶은 느낌이 들면 일단은 매사 조심하자. 사주경계를 더욱 강화하자. 앞뒤 좌우 한 번 더 살피고 그런 다음 발걸음을 떼자. 그러고는 내가 어떻게, 왜 이 높은 곳에 지금 있는 것인가를 살펴보자. 조만간 다시 내려갈 수 있음을 알고 준비하자. 예상한 것이 일어나면 우리는 크게 놀라지 않는다. 생각하지도 못한 사이에 허를 찔리면 그때 우리는 당황하고 헤매는 것이다. 그러니 대비하자.


내가 지금 높은 곳에 올라와 있다는 상황적 사실/압력이 많이 낮아져 있다는 과학적 사실/평소보다 가열 시간을 더 길게 해야 설익은 밥을 먹지 않게 된다는 경험측에 따른 사실/물도 평소보다 30% 정도는 더 많이 마셔야한다는 추가적인 응용의 사실/내 몸이 조만간 말린 자두 (프룬)나 호두를 필요로 할지 모른다는 예측적 사실, 이런 것들을 기억하고 그 각각의 경우에 대비하면 호사 뒤의 다마는 없을 것이다. 그것이 마귀이든 곤란한 상황의 연이은 도래든.


이제 오늘의 시를 본다.


거목 조병화님의 시다. 깊다, 따뜻하다, 그윽하게 내게 말한다, 강요는 전혀 없다, 그저 조곤조곤 말한다. 그래서 더욱 빠져든다, 짧아서 더 길게 느껴진다. 시란 이런 것이라는 인식을 다시 하게 만든다. 좋다!


'오늘은 나 내일은 당신 (me today you tomorrow)', 그저 내가 잠깐 아주 잠깐 먼저 갈 뿐이지요. 그러니 나를 너무 불쌍하게 여기지는 마세요. 알아요 그 고마운 마음, 하지만 난 괜찮아요. 그러니 당신도 마음 편하게 가지세요. 우리네 삶이 다 그래요. 언젠가는 내려와야 해요, 아래로 떨어져야지요. 그동안 나무 저 윗쪽에서 좋은 것들 많이 봤어요. 상쾌한 바람, 따뜻한 햇살, 지나가는 아름다운 사람들의 모습, 다 기쁘게 즐겼어요. 그러면 된 것 아닌가요?


시작이 있었으니 이제 그 끝도 있어야지요. 그게 순리지요, 그게 공평함이지요. 나는 그리 생각해요. 당신도 그런 마음을 가져보세요. 모든 것들이 훨씬 더 편안하게, 아름답게 보일 겁니다. 모든 것들을 다 고맙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겁니다. 시작이 있는 모든 것은 다 끝이 있어야 해요. 그래야 비로소 진정 아름답지요.


지금 불고 있는 바람, 오늘 낙엽을 몰고 가듯 내일은 저 바람이 어디론가 나를 몰고 갈까요? 그렇겠지요? 문득 헤르만 헤세의 시가 생각납니다.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 ("나의 이 삶의 여정은 과연 나를 어디로 데려가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내가 가면 안 되는 곳으로 나를 끌고 가지는 않을 겁니다. 결국 내가 가야만 하는 곳으로 나를 안내하는 것이겠지요? 그것이 순종이고 수용이지요. 그것이 멋지고 우아한 우리네 삶의 자세이지요?


낙엽

-조병화

세월의 패잔병처럼

보도 위에 낙엽이 깔려 뒹굴고 있습니다


나는 낙엽을 밟기가 안쓰러워

조심조심 길을 걷고 있습니다


낙엽은 나를 보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me today you tomorrow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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