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한 편을 읽기 위한 비용

- '알아야 면장을 한다'던 아버지의 말씀. 고영민 '반음계'

by 가을에 내리는 눈

내가 중학생 때 일주일에 한번 라디오에서 방송되는 모 대학교 철학과 교수님의 철학강의를 나는 아버지와 함께 빼먹지 않고 늘 열심히 들었다. 어느 날 아버지가 내게 말씀 하셨다. '알아야 면장을 한단다' 지방자치단체의 작은 행정 단위, 그 면의 책임자요? 아니 그게 아니고. 알아야 결국에는 벽 또는 담벼락을 바로 자기 눈앞에 마주하고 앉아 그저 답답한 시간을 보내는 그런 절망적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 (담장을 마주하는 상황을 면한다 - 면장)는 뜻이었다. 그래, 우선은 알아야 한다!


얼마 전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32번을 하루에 한 번 일주일 동안 내리 일곱 번을 들었다. 그때 자주 등장한 트릴 (trill) 주법, 갑자기 트레몰로 주법 (tremolo)과의 차이점이 궁금했다. 찾아보았다, 하지만 음악 이론 문외한인 내게는 이해하기 쉽지 않았다. 하루는 피아노 앞에 앉아 피아노를 치고 있는 여학생에게로 가서 물어보았다. 건반을 짚으며 설명해주는 그 학생의 설명으로 겨우 이해가 되었다.


우연히 만나게 된 이 시, 그런데 제목부터 내게는 걸림돌이었다. 반음계? 이게 뭐지? 왜 이런 제목을? 시의 내용과의 연관성도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냥 포기하기로 했다. 그러다가 이 시인과 그의 아버지와의 애뜻한 스토리를 알게 되었다. 이 시인에게는 열두 형제가 있었다. 그 중 막내 열두 번째가 바로 이 시인이었다. 시인의 아버지 나이 마흔 다섯에 보게 된 막내 아들. 얼마나 이뻐하셨겠나?


다시 마음 먹고 며칠 동안 반음계를 공부한다. 당연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결국 시간이 지나 시인이 이 시의 제목을 '반음계'라고 한 이유를 알 만큼 되었다. 비로소 시가 읽혀지기 시작했다.


이 시는 시인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과 관련되어 있다. 이를테면 얼마 전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한 시, 그분에게 바치는 송시인 셈이다. 베토벤의 교향곡 9번 마지막 악장의 제목은 '기쁨에게 바치는 송시' (Ode to Joy)다. 베토벤이 젊은 시절 접하게 된 쉴러의 시, 언젠가는 꼭 이 시를 내 음악에 넣어야지 이리 생각하던 베토벤. 결국 수십 년이 흐른 뒤 그의 마지막 교향곡의 마지막 악장에서 그는 자신의 꿈을 멋지게 이루어낸다.


다른 채널에서 '시 읽는 멋진 남자'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기 위해 꾸준히 시를 녹음하고 해설하고, 열심히 그 최적의 때가 오기를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는 나, 이 글을 쓰기 전에 이 시에 대한 나의 녹음 파일을 들어보았다. 멋지고 좋았다. 참으로 좋은 시, 아름다운 시, 힘이 나게 하는 시라는 생각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반음이란 두 음 사이의 간격 중 가장 작은 단위다. 피아노 건반에서 흰 건반과 바로 옆 위쪽의 검은 건반 사이의 간격 또는 검은 건반과 그 다음 흰 건반 사이의 간격, 때로는 흰 건반과 그 바로 옆의 흰 건반 사이의 간격이 반음이다. 반음계 (크로매틱 음계, chromatic scale)란 어떤 음악의 모든 음이 반음 간격으로 진행되는 음계를 말한다. 사실 이런 반음계에 의한 음악은 음악의 세계에서는 여전히 소수자의 위치에 있다. 흔한 경우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면 왜?


우선 음악에 독특한 특징과 표현력을 더해준다고 합니다. 기존의 단조 혹은 단조 음계에서 벗어난 독특한 음정을 만들어낸다는 것이지요. 음정을 좁히거나 넓히거나 하는 방식을 통해 다양한 감정의 표현도 가능해진답니다. 기존의 화음 구조를 넘어 독특한 화음 구성도 가능해진다네요.


이러한 반음계는 특히 클래식 음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 '탄호이저 서곡', 영국의 유명한 음악가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오페라의 유령', 그리고 드뷔시의 음악에서 이 반음계 기법이 쓰였다고 해요. 그런데 저는 잘 모르겠어요, 온음계 음악과의 뚜렷한 차이를.


하지만 하나 분명한 것은 있네요. 세 곡 모두 제가 좋아하고 제게는 참으로 좋은 음악으로 들린다는 것. 물론 재즈 혹은 대중 음악에서도 독특한 멜로디 라인이나 특이한 화성 진행의 구축을 위해 활용한답니다.


저는 시인이 반음계라는 단어를 이 시의 제목으로 쓴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가 아닌가 그리 생각합니다.


하나, 반음계는 피아노 건반에서 바로 이웃한 건반의 그 어느 것 하나도 건너뛰지 않고 차례차례, 차곡차곡, 꾹꾹 눌러 진행하는 음계입니다. 이것은 바로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시인 자신의 신의, 앞으로의 커미트먼트 뭐 이런 것을 표현한 것 아닌가 그렇게 봅니다.


둘, 아버지와의 친밀했던 지난 세월의 그 관계, 마치 나란히 이웃하고 붙어있는 반음계 속의 그 건반들처럼 그렇게. 그 관계의 깊이와 많은 추억들이 담겨있는 아름다웠던 시간들, 풍성하고 긍정적 의미에서의 복잡한 부자의 그 끈끈한 정!


셋, 온전한 한쪽이 아니라 그저 아버지 없이 홀로 남겨진 반쪽, 그 외로운 상태를 표현하려고 한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도 하지요.


넷, 아버지와의 추억, 그 지난 관계에 색을 더하고 감정적인 풍요로움을 보태고 그렇게 하려는 시인의 애뜻한 마음이 들어 있는 것 같아요. 작곡가들이 반음계를 사용하는 이유가 그것이거든요. 여느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 그 이상이었다는 것을 드러내고 그렇게 아버지에게 감사한 마음을 표하려 한 것인지도 몰라요. 독특하고 기존의 음악들과는 구분되는 뭔가 다른 음색 혹은 분위기를 창조하려는 노력.


그럼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먼저 제 나름의 방식으로 이 시를 한번 감상해 보겠습니다.


오늘 따라 아버지의 빈 자리가 크고 아득하게, 높게만 보인다. 그렇다 아버지는 내게 언제나 피아노 건반의 맨 우측에 있는 그들 높은음처럼 그리고 지금 저 높이 떠있는 새 처럼, 그들의 그 높은 울음의 소리처럼 그렇게 높은 존재셨다.


유난히 당신이 그리운 이 막내 아들, 마치 갑자기 뚝 끊겨버린 신나는 지난밤 꿈처럼, 이제 이곳에 혼자 남겨진 저는 그저 막막하고 아득하기만 합니다. 잊는 것도 사랑일까 싶다가도 이내, 굳이 잊으려 애쓸 것은 없다는 깨달음을 얻습니다. 다른 방식으로 새로운 마음으로 아버지를 기억하고 그 관계를 이어가면 되는 것이니까요.


40센티미터가 넘는 큰 가물치조차 오늘은 그저 놓아주었어요. 신난다 좋아할 그럴 마음도 아니고 가물치 그 녀석도 이런 날은 운수대통, 그냥 한번 다시 살아보라구요. 당신이 저 하늘의 구름이 되었다는 그 가슴 무너지는 소식은 제게 과연 얼마만큼의 무게로 다가왔을까요? 벼 한 줌 나오는 한 단의 벼가 열 단 모여야 한 짐이라던데, 글쎄요 벼 열 단의 한 짐도 작은 무게는 아니지만 제게는 적어도 그 열 배 그러니까 벼 백 단은 되었을걸요? 지게로는 절대 지지 못하고, 경운기라도 있어야 겨우 옮길 수 있을까요?


물비린내 나는 호수의 그 많은 물처럼, 그렇게 당장이라도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눈물 가득한 구름의 눈 가장자리. 그것이 아버지 구름이라면 이제 그러실 필요는 없어요, 이 막내 잘 있어요. 그리고 그것이 아버지 옆에 동무하고 있는 하늘의 구름이라면, 그 구름도 여전히 저만큼 슬픈가 봐요.


물정 모르고 바람결에 실려오는 맛없는 끝물 참외의 맛없는 향기, 거의 향도 나지 않는 그 향조차도 오늘은 그저 안스럽기만 하네요, 그 마지막 용쓰는 모습이 그냥 서글퍼만 보이네요.


또다시 하늘에서는 가신 아버지에 대한 저의 깊은 슬픔이 새가 떨어지듯, 아니 늦가을 낙엽이 떨어지듯 그리 우수수 떨어지네요. 그래도 뚝 떨어지지 않고 조금은 여유를 두면서 그리 살살 떨어지니 다행이에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그런 큰 고통' (천붕지통)을 이렇게라도 표현하고 싶었나 봐요.


다행히 저녁이 오고 있네요. 아무도 나를 보지 않는 그 어둠 속에서 저는 남은 울음 싫컷 한 번 더 울어야겠어요. 그리고 내일 아침이 밝으면 저의 새 날도, 이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의, 여전히 이 땅에 살고 있는 이 아들과의 정겨운 관계도 그리 다시 시작될 것이니까요. 새롭게 아주 새로운 방식으로 그렇게. 아버지도 편히 주무세요!


반음계

- 고영민

새소리가 높다


당신이 그리운 오후,

꾸다만 꿈처럼 홀로 남겨진 오후가 아득하다

잊는 것도 사랑일까


잡은 두 뼘 가물치를 돌려보낸다

당신이 구름이 되었다는 소식

몇 짐이나 될까

물비린내 나는 저 구름의 눈시울은


바람을 타고 오는 수동밭 끝물 참외 향기가

안쓰럽다


하늘에서 우수수 새가 떨어진다


저녁이 온다

울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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