냅둬유! - 그래봐야 결국 단 한 번

- 용기, 대처, 나 응원하기, 함께 가기. 용혜원 '한 번쯤은'

by 가을에 내리는 눈

브런치 작가님 한 분의 글에서 이런 귀한 문구를 보았다 - '그럼 어때!/그럴 수도 있지!/그러거나 말거나! - 나는 나!'


지난 시월의 어느 이른 아침이었다. 외국에서 또 한 번 맞는 우리의 대명절 추석, 새삼스럽게 추석날의 그 거한 아침 상이 생각나던 참이었다. 그 틈을 빌어 잠시 마음이 싱숭생숭하던 순간.


내가 나를 향해 하는 말이기도 했고 또 나를 둘러싼 다른 사람들에 대해 내가 하는 말이기도 했다, 물론 내 속으로만.


오늘 아침 다른 작가님 글에서는 이런 보석 같은 구절이 있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기에 비로소 이것이 있다' (차유고피유 此有故彼有, 이 차/있을 유/연고 고, 그러므로 고로/저 피/있을 유). 석가모니불이 하신 말씀이란다.


두 가지 깊은 묵상의 주제가 동시에 내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다. 살짝 버겁다, 하지만 늘 그렇듯 하나씩 차례로 '처리'에 나선다.


하나, 아니, 괜찮아. 그럴 수도 있는 거야. 다음에 좀 더 잘하면 되지? 뭐 인생에서 기회가 그것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잖아? 그래도 잘한 것이야, 내가 볼 때는 그래. 다음에는 아주 조금만 달리 하면 훨씬 더 좋은 결과를 손에 쥘 수 있어. 분명!


'따뜻함과 긍지', 내가 나를 바라보는 창의 모토다. 다른 사람을 놓고 보면 이렇게도 해석된다. 그 사람이 그랬다고? 그러면 어때? 그 분도 이제 한 번쯤은 그런 행동도 해 볼 수 있는 것 아닌가? 인생 뭐 그리 길다고? 응원과 격려는 못할망정, 아무튼 못난 사람들 하고는!


'너그러움과 선함' 내가 세상을 보는 창의 모토다.


둘, 위의 하나와 바로 연결된다. 그러면 어때? 그럴 수도 있는 거야. 누구나 다 그래. 너만 그런 것 아니야. 그러니 그리 기죽어 있지 말아! 나에게 그리고 내 친한 동무에게 하는 말이다. 우리는 자주, 특히 많이 힘들 때는 나를 응원하는 나, 나의 소중한 사람을 격려하는 내가 필요하다. 그래야 이 세상을 끝까지 살아낸다.


셋, 그러거나 말거나. 내버려 둬. 처음에는 이런 자세를 취한다, 그렇다. '오불관언', 아니 나 살기도 바쁜 세상에 뭐 다른 사람까지. 여전히 넓은 그 오지랖 하고는!


그러나 사실 이 말은 방관이나 방치의 그것이 아니라 그에게, 내가 믿는 그 사람에게 잠시 숨을 쉴 여유를 주는 것이다. 아이, 좀 지켜보자. 그 사람도 좀 쉬어야지. 분명 무슨 생각이 있을 거야, 암.


내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신경 쓰지 말아. 그들이 네 인생 책임지는 것 아니잖아?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그들은 모두 그냥 남이거든? 너의 그 힘든 상황을 이용해 먹지나 않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그리 생각해.


그러니 크게 괘념하지 말아. 너는 그저 너야. 네 인생 그냥 네 것이라니까? 다른 그 누구의 것도 아니야. 사실 부모님까지 포함해서. 그분들이 뭐 어찌 해줄 수 있는 것이 더는 없거든? 너도 알잖아? 너의 자식의 경우에도 서로 똑같아. 마음은 있겠지, 서로 간절하게. 그러나 기실 해줄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어. 그게 삶이야.


나는 어느 작가님의 그 짧은 글에서 이리 많은 것을 얻었다. 감사는 표했다, 그러나 여전히 고맙다.


이번에는 조금은 다른 차원의 사유의 단초 - 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있는 것이다. 석가모니불이 괜히 부처의 경지에 오른 것은 아님을 실질적으로 깨닫게 해주는 말이었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큰 것이 있어 작은 것이 있고, 작은 것이 있으니 비로소 큰 것이 보인다. 그 작가님이 그림까지 그려가며 한 말이다. 공감이 갔다. 존재와 깨달음의 상대성을 말하는 것이리라. 오죽하면 아인슈타인도 그의 상대론에서 '동시성의 상대성'을 말하고 있겠나?


어떤 관찰자가 어느 지점에서 보면 두 개의 사건이 동시에 일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누가 움직이는/등속으로 이동하는 물체 안에서 그 현상을 보면 꼭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의 동시성 또한 이처럼 관찰자의 위치와 그 상황에 따라 상대적으로 결정된다, 이런 설명이었다.


내 주위에 다른 누군가가 있기에 비로소 나의 존재는 그 의미를 갖는다는 말도 될 수 있다. 굳이 고독 혹은 감정적인 외로움의 상황을 말하지 않더라도, 이 지구상에 달랑 나 혼자만 존재한다면 그 또한 엄청 골치 아픈 일이 될 것이다.


지금 이 세상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함께 살고 있다고, 그래서 수없이 많은 문제들이 생기는 것이라고 푸념하는 우리들. 아마도 혼자 사는 지구에서는 그보다 훨씬 많은, 그리고 치명적으로 심각한 문제들이 등장할 것이다.


그러니 어쩌면 우리는 나 아닌 누군가가 내 주위에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에게 감사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니, 고마운 마음 가져야 한다. 그녀가 있어 사랑을 하고 대화를 하고, 이 브런치에 글을 쓰고 그의 글을 읽고, 이 모든 것들이 가능한 것 아닌가?


내가 도움을 받고 또 내가 도움을 주고, 그런 주고받음의 연속이 결국은 우리네 삶을 연속되게 하는 것 아닌가?


냅둬유, 내버려 두어요!


방치가 아닙니다. 의도적 유기는 더욱 아닙니다. 그저 내 자신에게 그리고 상대방에게 조금 시간을 주는 것이지요. 스스로 일어날 여유를 주는 것이지요. 내게는 믿음이 있으니까요, 나 자신에 대한 그리고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 존재에 대한.


'대인호변 기문병야, 대인호변 미점유부' - 큰 인물이, 큰 사람이 한번 마음 먹고 변하면 가을에 털갈이 하는 호랑이처럼 그 무늬가 밝게 빛난다, 그리고 굳이 점을 보지 않더라도 미쁨이 있다 <그저 믿음이 가고 예뻐 보여서 보는 사람에게 기쁨이 느껴진다>. '주역'에 나오는 말입니다.


그래봐야 결국 한 번 있는 우리네 삶, 한번 마음껏 살아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듯합니다. 믿어주고 밀어주고, 늘 응원하고 힘을 주는 존재가 주변에 있다면 더욱 신이 나겠지요. 물론 나도 그 상대에게 그리할 준비가 되어 있구요. 우리 모두 그리 한번 살아보면 어떨까요?


'나는 나! / 그가 있으므로 내가 있고 내가 있기에 비로소 그도 있다!'


오늘의 시를 봅니다. 이 글에 딱 맞는 좋은 시를 찾았지요.


한 번쯤은

- 용혜원

한 번쯤은

정말로 하고 싶었던 일을

하면 안 될까?


그동안 하고 싶어도

혹시나 해서 미뤄뒀던 일

설마 해서 망설였던 일


아무 생각 없이

아무 후회 없이

눈 딱 감고 한 번쯤은

폭 빠져버리면 안 될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상으로 돌아올 수만 있다면

한 번쯤은 정말 하고 싶었던 일을

해보고 싶다


때로는, 물론 충분히 각오를 하고, 그리 그냥 해보면 어떨까요? 대번에 폭삭 망할까요? 적어도 우리가 쉽게 그런 폭삭 망할 일을 할까요? 아닐 겁니다. 그러니 이제는 한번 해보시는 것도 좋아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현직 미국 대통령이 나온 대학 펜실베니아주립대 (University of Pennsylvania)의 연구 결과가 용기를 줄 겁니다.


"우리가 하는 걱정거리의 79%는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다.

16%의 사건은 미리 준비하면 충분히 대처할 수 있다. <이 둘을 합치면 이미 95%의 안전권을 우리는 손에 쥐고 있습니다, 물론 잘 준비를 한다면>


그러니 노심초사, 밤잠을 설치는 우리네 일상 속 걱정이 현실로 우리 앞에 등장할 확률은 '겨우' 5%다."


우선 이 연구결과를 기억하자. 그리고 '어쩌지? 나 이제 어떻해? 나 이러고는 못 살 것 같아.' 이런 패닉의 상태를 즐기지 말고,


그래, 16%는 준비만 잘하면 해결책이 있다고 했으니 마음 단단히 먹고 한번 해보자. 그리고 5% (1/20)는 달리 피해 갈 방법이 없다고 하니, 마음의 준비도 하고 그 후의 대책도 미리미리 생각해 두고, 그리 살자.


어쩌겠어? 하나 (1/20) 때문에 나머지 의미 있는 열아홉 (19/20)을 그냥 버리고 도망갈 수는 없잖아? 어디로 도망을 가겠어 사실? 그러니 당당히 대면하자, 맞서자 그 21%에 (16%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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