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초파리 한 마리, 그저 얼얼한 내 손바닥

- 격정과 역정, 냉정과 오만, 항심의 세계. 오세영 '4월'

by 가을에 내리는 눈

나방들은 왜 여름날 가로등 불빛 안으로 미친듯이 돌진하나? 왜 그렇게 허망한 죽음을 맞나? 전쟁이라면 장렬한 전사라고나 하겠지만 그저 자기가 이유 없이 날아든 것 아닌가? 왜? 그들에게는 그 정도의 인지능력도 없나? 서로 얘기도 안 해주나, 거기 가지 말라고, 죽는다고?


이런 생각을 한 내가 그들보다 못했다 사실은. 열심히 찾아보니 과학은 내게 이렇게 말해준다 - 태양이나 달빛 같은 자연의 빛 (멀리 떨어진 광원에서 오는)에 대해서는 나방들은 그것을 인지하고 너무 가까이 가지 않으려 비행의 고도와 방향 등을 조절한단다.


그런데 가로등 불빛이나 곤충잡이 등불의 경우 (인공의 빛)에는 그 빛의 발원지가 너무 가까워서 그들에게 인지 및 행동의 장애를 일으킨단다. 애써 멀어지려고 해도 오히려 그 불빛 가까이로 소용돌이치듯 돌진하는 결과를 가져온단다. 고도의 조절도 거리의 조절능력도 일시에 상실한다는 것이다.


나는 처음에는 그저 무지몽매 (인간으로 치면) 혹은 순간적인 충동 (역시 사람으로 친다면 일시적인 쾌락의 추구)에 따른 잘못된 행동의 결과라는 생각을 했었다. 과학은 그게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초파리 한 마리가 내 방 안을 날아다닌다. 그냥 보고 넘길 수는 없다. 정신을 집중하고 무슨 대단한 일이라도 하는 듯 그리 긴장의 상태다. 드디어 사정권 안에 들어왔다. 냅다 손바닥을 친다. 어라, 초파리의 사체는 없고 그냥 내 두 손바닥만 벌겋다. 얼얼하다. 그것 하나 제대로 힘의 조절을 못하나? 이내 자책이 뒤따른다.


'다른 경우에는 필요한 정도의 힘의 세기 계산이 잘 되는데 다만 초파리를 잡을 경우에는 그게 안 된다, 인간의 경우에는 그게 그렇다' 이런 과학적 연구가 나온 적은 없다. 그렇다면 뭐지?


여전히 살아있는, 동물로서의 야생의 사냥본능, 뭐 이리 말할 수도 없지 않은가? 그깟 초파리 한 마리를 두고서.


결국 우리가 말하는 '오바' (over, 과대하게/~의 한도를 넘어/극단으로)의 결과라는 결론에 저는 도달했습니다. 욕심의 본능적 작동인 것이었지요. 기를 쓰고, 마치 이 놈 놓치면 뭐 큰 일이라도 날 것처럼 그렇게 난리를 친 것이지요. 일상 속에 이런 일 아주 많습니다.


부부 싸움을 합니다. 심판이 없습니다, 룰도 없습니다. 그냥 그때의 기분에 따라 전투를 합니다. 기를 쓰고 합니다.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내뱉고 있는 것인지, 그게 상대방에게 어떤 의미로 달려갈 것인지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CCTV를 달듯이 자동 녹음장치가 집에 있으면 좋겠습니다. 나중에 한번 차분하게 마주 앉아 리뷰세션이라도 좀 갖게.


얼얼해진 손바닥은 조금 있으면 금새 멀쩡해집니다. 그런데 어떤 것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한번 내 귀에 머릿속에 그리고 마음에 들어와 박힌 그 무섭고 후벼파는 듯한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아니 자기복제 및 자동 증폭의 과정을 거쳐 커져만 갑니다. 급기야 괴물이 됩니다. 꿈에도 자주 등장합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작가님이 쓰신 글 중에 이런 대목이 있었습니다. 비 맞으면 마치 죽는 것처럼, 비가 닿으면 마치 모든 것이 녹아내릴 것처럼 그런 두려움과 선입관 속에 거의 모든 어른들은 본능적으로 아니 습관적으로, 그리고 기계적으로 비를 피한다고.


그 글을 읽고 저는 비를 덜 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부정적인 방향으로 닳고 파괴적으로 찌든 작금의 제 모습을 다시 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젊은 날 한때는 비 오는 날을 그리 즐겼는데? 일부러 비를 맞고 그것을 핑계로 막걸리집엘 들어갔는데? 그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데?


제가 좋아하는 백석 시인의 시 중에 자기 방에 들어온 거미 가족을 홀대하듯 그리 밖으로 내몰아버린 자신을 나무라는 장면이 있습니다. 아마 '수라'라는 제목의 시일 겁니다. 언제부터인가 제 숙소에서 발견되는 거미를 아주 조심스럽게 밖으로 모셔내는 저를 보았습니다. 조지아에 있을 때도 그랬습니다. 그냥 마음이 편하고 좋았습니다.


요즘 다시 제 마음이 조급해진 것 같습니다. 초파리라고 우습게 본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초파리 해프닝은 제게 이 글을 쓰게 해주네요. 고마운 초파리! 다시 날아다녀도 이제는 굳이 기를 쓰고 잡으려 하지는 않겠습니다. 오는 정 가는 정? 다시 평상심 혹은 항심으로 돌아간 나?


'과유불급', 지나친 것은 모자란 것과 같다, 논어에 나오는 말입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조만간 다시 글을 쓸 생각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차라리' 넘치는 것이 낫지, 부족한 것/모자라는 것/미처 닿지 못한 것은 참지 못하지요. 남아 버리는 한이 있어도 일단은 내 손에 내 집에 내 세력 안에 확보해 두어야 마음이 편하지요. 이것이 문제입니다.


앞으로는 설혹 또 다시 초파리를 잡아야 하는 순간이 오더라도 이전처럼 그리 죽어라 손바닥을 마주치지는 않겠습니다. 적정 힘의 세기를 냉정하게 조절하겠습니다. 중국산 벌레잡이 채가 하나 있으면 더욱 좋겠지요?


오늘의 시를 본다.


우리들의 젊은 날, 우리 모두 각자의 아름다운 날들. 내 안의 우레 소리가 그칠 줄을 모르던 그때, 그건 긍정의 소리였을까 아니면 그저 나를 힘들게 하는 심술부리는 소리였을까? 격정이란 뭘까? 분명 '강렬하고 격렬한 감정', 부정적인 의미는 별로 없는데?


아 자칫 어느 순간 이 긍정의 격정이,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싹인 그 존재가 역정으로 바뀌는 위험이 있구나? 시인은 지금 그런 경험을 말하고 있는 것이구나? 노여움/앙심에서 비롯되는 거스르는 감정, 분노. 무엇을 거스르는 것일까? 본래의 나의 항심 (恒心, 늘 변함 없고 흔들림 없고 그렇게 평온한 마음의 상태)에서 어긋나는 것? 왜? 무엇이 나를 그리 흔들어 놓았을까? 순간의 욕심이? 아니면 두려움이?


그런 고요한 나의 평정심을 거스르는 나쁜 감정, 그래서 역정인가? 그저 따스한 사람의 마음, 그 정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역의 감정?


아무튼 우리네 일상 속에서 창조적 동인으로 작동할 수 있는 격정이, 자칫 역정으로 흐르는 것은 막았으면. 그런 생각을 해본다. 격정은 그저 격정으로 남아, 순수의 열정으로 그렇게 무언가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결과를 가져왔으면 좋겠다.


우르르 우르르 우레 소리 들리고 또 번개도 번쩍이고, 그러나 결국 그들은 지나간다. 잦아들고 잠이 든다. 다시 파란 하늘이 우리들의 눈에 들어온다. 강물을 꽁꽁 얼린 겨울이 지나가면 그 얼음 아래로 여전히 흐르고 있었던 푸른 강물이 다시 보인다. 춥고도 추웠던 지난 한겨울에도 사실은 그랬다, 그렇게 푸르렀다, 우리가 보지 못했을 뿐이지.


아무튼 그 겨울은 가고 4월이 왔음을 시인은 기뻐한다. 이런저런 이유로 그저 괴롭게만 느껴졌던 우리들의 젊은 날, 몸을 떨게 하는 열병과도 같았던 그 시절, 이별의 서러움에 잠못 이룬 수많은 날들, 다 그렇게 지나갔다. 이제는 4월이다. 그런데 가만 뒤돌아 보면 그때도 사실 그리 먹구름만 가득한, 가슴을 울리던, 괴롭고 괴로웠던, 열병을 앓았던, 서러웠던 겨울만은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4월이 그것을 알려준 것도 있고, 또 한 번 찾아온 4월 속의 세월의 흐름이 나를 그만큼 크게 한 것일수도 있다. 곧 다시 찾아올 다음번의 그 4월, 그때 나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어떤 모습의 나로 있을까? 존재는 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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