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물론 그리고 유심론, 하나됨. 임보 '자작나무에서 돌배나무까지'
덴마크의 철학자 쇠얀 키에르케고르, 그는 이렇게 말한다 - "우리가 실존을 이야기하고 본질과 그 존재의 가치를 말하지만, 결국 나약한 우리 인간은 신에게로 돌아가 그에게 의지해야 한다." 장 폴 사르트르와 대척점에 서 있는 '유신론적 실존주의' 철학의 거두.
그의 묘비에는 이런 아름다운 글귀가 적혀 있다. '이제 조금만 더 지나면, 결국 나는 승리할 것이다. 전투 전체가 즉시 끝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는 장미꽃 가득한 방에서 편히 쉬게 되리라. 그러고는 끊임없이, 그렇게 끊임없이 나의 예수님과 대화하게 될 것이다.'
'섭리' (providence)란 '다스리다/이치/도리' 등의 뜻을 가진 한자어다. 자연이나 세상 만물을 다스리는 이치나 법칙을 의미한다. 기독교에서는 하느님의 뜻이나 계획, 즉 세상과 우주 만물을 다스리는 신의 뜻을 가리키는 용어로 쓰기도 한다. 그러니까 어떤 면에서는 자연의 질서나 법칙을 넘어선 그 무엇을 상징한다.
저는 개인적으로 신이라는 말 단독으로 쓰기보다는, 신과 함께 슬쩍 섭리 그리고 스피노자의 대자연을 끼워넣기를 좋아합니다. 소심한 비겁의 한 형태일 수도 있고, 여전히 아직도 남아있는 저항감과 내부의 또 다른 나의 소리를 대변하는 것일 수도 있지요. 단독과 집중의 위험을 우회적으로 피해보려는 꼼수일 수도 있구요. 좀 더 그럴 듯하게 말하면 열린 마음, 다양성에 대한 수용, 범용성의 가치에 대한 공감 이런 것일 수도 있어요.
오늘은 신과 섭리, 자연에 대해 말해보려 합니다. 그저 아주 단순한 제 묵상의 결과를 가지구요. 사람마다 다 다를 그 주관과 신비의 영역을.
제가 어릴 때부터 유아세례를 받고 영성체를 하고 성당에서 복사 (acolyte/altar boy - 성당에서 신부님을 도와 미사 준비를 하는 소년)를 하고, 그런 카톨릭 집안의 아들로 자란 것은 다른 글에서 잠깐 얘기드린 바 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소위 '냉담자'가 되었지요. 그 이후 제게 신의 세계, 신의 영역은 늘 복잡한 의미를 가진 어려운 주제로 다가옵니다. 완전히 이쪽도 아니고 또 그렇다고 완전히 저쪽도 아닌, 어쩌면 어정쩡한 스탠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 하나는 있습니다. 인간은, 특히 저를 기준으로 본다면, 언제나 늘 항상, 홀로 꼿꼿하고 혼자의 힘으로 당당하게 서있기에는 사실 많이 나약한 존재라는 사실에 대한 인식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인간은 종국에는 누군가를 믿고 의지해야 한다는 생각과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그것이 신일 수도 있고 신은 아니지만 석가모니불 같은 이미 크게 깨달음을 얻은 존재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자연일 수도 있고 때로는 내 안의 또 다른 나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지금의 나 아닌 그 누군가를 나는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저는 그렇습니다. 물론 그것이 때로는 나의 동무, 친구 혹은 부모형제일 수도 있겠지요. 아무튼 그 누군가.
어쩌면 무신론적 실존주의 철학의 거물 사르트르는 신이 아닌 자기 자신을 믿고 의지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평생 신체적 아쉬움과 늘 혼자라는 인식이 그를 괴롭힌 상황을 고려한다면 더욱 그랬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물론 철학에 크게 의존했겠지요. 베토벤에게는 음악이, 스피노자에게는 일상 속 철학하기를 통한 구원에 대한 믿음이 그랬던 것처럼.
이처럼 우리네 삶에서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깊은 마음으로 믿고 의지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와 가치를 지닙니다. 어려움을 이겨낼 힘을 그 속에서 얻을 수도 있고 새로운 가능성과 희망을 품게 하는 존재가 될 수도 있지요.
'샘물처럼 솟아나는 꿈과 희망', 어릴 때부터의 제 삶의 모토입니다. 저는 희망이 없으면, 주변에 작은 달콤함들이 없으면 하루하루를 살아내기가 힘들어요. 중고등학교 시절 당장 다음 주로 다가온 기말고사도 그렇고 젊은 시절 분명 힘들고 빡세기만 할 일주일간의 뉴욕 출장도 그렇고, 전혀 뜻하지 않게 나를 찾아온 이번의 이 난관도 그렇고.
뭔가 비빌 언덕이 있어야 잠시 숨을 고르고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허리띠를 졸라매고 그렇게 달려 나갈 엄두가, 의욕이 생기지 않겠어요? 저는 그런 부류의 인간입니다. 지금까지 죽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혹시 이런저런 이유에서 아직도 여전히 이런 존재가 없다면 한번 마음 먹고 만들어 보세요. 그리 나쁘지만은 않을 겁니다. '둘이 하면 하나보다는 훨씬 낫다' (Two heads are better than one), 디즈니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대사입니다. 물론 '완인상덕 완물상지'의 경구도 잊지 마시구요 - 사람에게 너무 빠지면 어느새 자기 자신의 본성 그 자체를 잃게 되고, 어떤 물건이나 습관에 너무 깊이 빠지면 그 물건 본래의 존재가치와 효용을 잊고 잃어버리는 결과가 된다.
저는 언제부터인가 신과 섭리, 대자연을 같은 카테고리의 성스러운 존재들로 봅니다. 그 이름이 꼭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합니다. 물론 이런 종교 혹은 저런 종교, 그렇게 '우리 그룹'과 '너희들 그룹'은 나뉘게 마련이지만요. 하지만 이 그룹이면 어떻고 저 그룹이면 또 어떤가? 예전 아주 젊을 때 이런 제목의 책을 본 적이 있습니다 - '예수와 석가의 대화'.
저는 개인적으로, 지극히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모든 도는, 모든 완전함은 결국 통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이 짧은 문구 하나가 참으로 무서운 말입니다. 그야말로 '외통수'이니까요. 자기와 다른 그 무엇과 저 위에서 서로 만나고 서로 대화하고 그렇게 그 근본 정신이나 취지에 있어서 상호 공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미 그 순간 도가 아니고 완전함이 아니라는 논리적 언어적 귀결로 이어지니까요.
통해야 하고 통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분들 모두 그리 생각하고 이미 그리하고 있을걸요? 그러니 우리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 즉 신이고 크게 깨달은 존재이고 섭리이고 자연이지요? 제가 제목에서 '당신의 신과 섭리, 나의 신과 섭리와 자연' 이렇게 시작했지만 여러분의 것과 저의 그것은 결국, 이미 같다는 것을 간파하셨지요? 신, 섭리 혹은 자연의 기본적 요건 자체가 바로 '하나됨/결국은 하나로서의 도/완전함'이니까요.
이제 오늘의 시를 본다.
깊고도 깊은 시다. 과연 땅의 신 ('토공')다운 대답이다. 요 며칠 가슴이 답답하던 나를 속 시원하게 만들어준 고마운 시다. 나는 지금 얼마나 큰, 아니면 얼마나 작은 '나만의'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인가? 넓은 곳에 살려면 내게 돈이 드나? 청소나 관리에 힘들까? 그래서 일부러 나는 지금 이 작은 나의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인가, 그 오랜 시간을? 어리석음과 욕심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이리 갇혀 사는 것이리라.
여러분도 이 자리에서 꼭 한번 읽어 보시라고 굳이 여기 이렇게 적습니다.
자작나무에서 돌배나무까지
- 임보
그대 사는 세상이 얼마나 넓은가고
묻기에
동은 아침인데 서는 저녁이고
남은 여름인데 북은 겨울이라고
대답했더니
토공이 웃는다
그의 집 뜰은 한 십여 평 되는데
하루에 만리를 달리는 그의 말도
뜰 좌편의 자작나무 한 가지 끝에서
뜰 우편의 돌배나무 한 가지 끝까지
이르는 데는
몇천 년이 더 걸린다고 한다.
그러니 이 얼마나 우스운가, 작금의 이 좁은 세상에서의 우리들의 이 아둥바둥 거리는 그 모습이? 작고 작은 일에 슬퍼하고 낙담하고 주저앉고, 그러다가 또 금새 일어나 헤헤 거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신이 나서 춤을 추어대고? 하긴 그러니 인간인가? 그래서 인간인가? 그래야 인간이란 말인가? 오호통재라!